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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고시마의 조선 사기장들

美人完成 2008. 12. 14. 02:24

가고시마의 조선 사기장들

 

 

지난 17일 일본의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했습니다. 일본 근대사를 보면, 가고시마는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며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근거지였습니다. 또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이 전쟁포로의 한을 승화시켜 아름다운 사츠마야끼, 즉 사츠마 도자기를 탄생시킨 곳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다른 지역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은 이름도, 성도 일본식으로 바꾸었건만, 이곳의 조선 사기장들은 지금도 단군을 모시는 신사를 차려 놓고 있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조선의 풍속을 그대로 유지한 곳입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이곳의 조선계 가마인 심수관 가마를 방문했으리라 생각합니다.

ⓒ 신한균
4개의 섬나라 일본, 그 중 남쪽 섬 큐슈, 그 큐슈의 최남단 가고시마현, 이곳의 옛 이름 사츠마, 여기서 나오는 도자기를 사츠마야끼라 부릅니다.

사츠마야끼는 큐슈 히젠 지방의 아리타와 카라쯔야끼처럼 종류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곳 도자기의 큰 맥은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 사기장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 사기장을 납치해간 장본인은, 시마즈 요시히로, 다이묘라 불리는 이 지방의 영주이자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침략한 왜군 장수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잔인한 왜군의 장수이지만 일본 차 세계에서는 일본 다도의 확립자 센노리큐의 제자이며, 특히 조선 사발을 광적으로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날 때쯤(1598) 조선의 사기장인 '김해', '박팽의', '심당길(심찬)' 그 외에 金, 申, 李 등 22개의 성을 가진 70여 명을 납치해 자기의 영지인 사츠마로 귀환합니다.

그 뒤, 납치당한 이분들이 도자기를 빚기 시작한 지 얼마 안 가 사츠마는 히젠야끼(카라츠야끼와 아리타야끼의 총칭)와 더불어 일본 도자기의 한 축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면 끌려간 조선 사기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김해(金海)', 경상남도의 '김해'라는 지명이 성이 된 사람입니다. 이분은 사츠마야끼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분은 일본에 끌려가서 몇 년 뒤, 사무라이로 책봉되고 땅을 하사받는 등 최상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 사츠마 차사발. 에도시대
ⓒ 개인소장
그러나 그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은 도자기 빚는 일은 아주 잘했으나, 일본인 다도에 사용하는 차사발 그리고 다도구는 잘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을 다스리는 다이묘는 이분들을 다도구 형태를 잘 아는 일본 중부지방, 세토까지 파견해 다도구 제작법을 연구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주가 죽자, 그 대를 이어 받아 일하다가 5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이분의 아들도 계속 대를 이어 다른 조선 사기장과 협력해 사쓰마야끼를 더욱 발전시킵니다.

또, 이 분의 손자는 역시 조선 사기장에 의해 발전된 일본의 아리따 지방의 백자기술을 도입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교토 도자기 만드는 기법도 도입하여 이백 수십 년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사츠마 도자기의 골격을 완성시킵니다. 그러나 일본 메이지 유신 때, 이 사람의 직계는 단절됩니다.

▲ 박평의 선생의 묘
ⓒ 전충진
김해와 더불어 또 한 사람 사츠마 최고의 사기장, 박팽의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사기장을 납치해 갈 때, 집단으로 납치해 갔습니다. 박팽의, 이분은 1597년 남원성 함락때 심당길과 같이 끌려온 분으로 조선 사기장의 수장격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곳은 가고시마의 나와시로가와이며, 처음에는 조선인이 집단 거주하는 고라이죠에 살면서 도자기를 빚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사츠마 도자기에 큰 자취를 남기게 된 것은, 아리따에서 이참평이란 조선 사기장이 백자광맥을 발견한 것처럼 이 사람은 사쓰마에서 백토를 발견합니다.

이 백토의 발견으로 사츠마도 흰 백자를 빚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전에는 조선사기장을 끌고왔지만, 사츠마야끼는 '히바라끼'와 검은 도자기 즉, 흑유계 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히바라끼가 무엇이냐구요? 이것은 바로 조선에 가져온 흙과 유약 그리고 조선 사기장이 빚었으나 불만은 일본의 소나무로 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일본의 옛 기록에 나오고 또 사쓰마의 옛 가마 발굴 조사 때, 조선의 백토 세 덩어리가 출토되어 확실히 밝혀진 일입니다.

▲ 조선 백토로 빚은 히바라끼 차사발. 박평의의 작품으로 추정.
ⓒ 개인소장
박팽의는 이 백토를 발견한 공적으로 다이묘로부터 격찬을 받았고, 높은 계급의 사무라이에 책봉됩니다. 사츠마에서 백토의 발견, 이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로인해 사츠마 도자기는 외국에 수출도 하게 되고 일본을 대표하는 사츠마 도자기를 만든 계기가 됩니다.

후에 박팽의는 사츠마야끼의 도조로 숭상받게 됩니다. 그리고 박팽의의 후손 중 11대 후손은 프랑스 만국박람회에서 도자기로 금상을 타기도 합니다만, 이제는 명맥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임란 때 사츠마로 끌려간 다른 사기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사츠마에 끌려온 많은 사기장들은 고려촌에 몰려 살았으며 대부분 도자기 빚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일본의 다른 지역에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에 비해 끝까지 조선의 풍속을 지켜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나라의 도자 사학자이신 윤용이 교수님이 지은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한 부분을 발췌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1780년대 도쿠가와 시대 중기의 의사로 이곳을 여행했던 다치바나 난케이는 저서 <동서유기> 속에 고려의 자손들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다치바나의 기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츠마 주 가고시마 성 아래로부터 70리 서쪽인 나와시로가와 고을 주민은 모두 고려인이다. 옛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때, 이곳 번주가 조선국 한고을의 남녀노소를 모두 잡아왔다. 번주(다이묘)는 조선인들에게 이곳의 토지를 주고 살게 했다. 그들의 자손은 지금도 의복에서 언어까지 조선 풍속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이 기록에는 '날이 갈수록 번창해 수백 호를 이루고 있다'고만 되어 있는데, <서유잡기>에는 이곳에 살고 있는 조선인 자손이 1500여 명이라고 적고 있다.

다치바나는 '가고시마 현의 나와시로가와곳의 담당 사관의 소개장을 가지고 伸毛屯(신모둔)이란 촌장을 찾아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고 쓰고 있다. 다치바나는 또 이들의 고향을 잊지 않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다치바나가 "이곳에 자리잡은 지도 200여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일본이 고향인 셈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자, 신씨는 한참 후 "어찌 고향을 잊으랴! 200여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귀국이 허락된다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고 말했다. 이 대답에 다치바나는 "슬픈 마음이 가득했다"면서 "고향을 잊지 못하는 도공 후예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눈물겨운 필치로 그려주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여기서 신모둔이란 촌장이름이 나오죠? 필자의 성이 신씨인지라,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일본에서는 신(申)의 의미가 원숭이입니다. 그리고 옛 일본의 지배층은 일반 민중을 원숭이에 빚대어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성이 신씨인 이분은 일본 백성을 상징하는 원숭이가 아니라는 표시로 조선의 성인 신(申)에다, 사람 인(人)자를 붙여, 신(伸)이라 썼고, 그것으로 조선인임을 암시했다고 여겨집니다.

▲ 일반국민은 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는 것을 원숭이 상으로 표현한 도자기 인형.
ⓒ 개인소장
그들은 마을 뒤에 고조선의 개조 단군을 모시고 사당을 세웠다. 지금도 남아 있는 다마야마궁이다. 단군을 수호신인 동시에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 도공들은 가마로의 발걸음을 사당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이 나와시로가와 14대에 이르는 생의 철학이 되고 스스로의 문화율이 되었다고 '심수관'은 말하고 있다.

아참, 이글에 심수관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죠? 이분의 선조는 심찬이라는 분으로 1597년 남원성이 함락할 때 박팽의와 같이 끌려왔으나 포로일 때 느낀 굴욕감으로 일본에서 이름을 심당길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분의 자손들은 계속 사츠마에서 끌려간 사기장의 여러 가문과 함께 도자기 가업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1857년 이곳 사츠마야끼의 관요(지방 정부의 직속 가마)의 자기(백자)부분의 책임자는 12대 심수관이었고, 그 '심수관'이라는 습명이 지금의 15대 심수관으로 이어져 현재는 사츠마야끼의 상징으로 알려있습니다. 심수관 가문은 끌려간 다른 사기장과 달리 조선성을 그대로 지킨 가문입니다. 14대 심수관은 일본의 명예 한국 총영사를 맡고 있습니다.

▲ 왼쪽 - 12대 심수관 작품. 1893년 미국 시카코 세계박람회 출품작. 중간 - 14대 심수관 오른쪽 - 14대 심수관 작품.
ⓒ 심수관
이 글을 쓰다보니 소주 한 잔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일본인이 니혼슈라 부르는, 청주보다 일본 소주가 젊은층에서 인기입니다만, 소주를 만드는 기술을 일본에 가르친 사람이 조선의 사기장들이었다 합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왜정시대인 일본 제국주의 시절, 세계 제2차 대전의 원흉, 도고 총독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이 패하자 전범으로 사형당했습니다만, 이 사람이 바로, 사츠마 조선사기장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개인소장
2004-12-20 18:57 ⓒ 2007 OhmyNews

출처 : 내장산제다원
글쓴이 : 심산 박동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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