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의 이해/세계종교 자료1.

[스크랩] 석가모니의 생애와 업적과 교훈

美人完成 2008. 10. 13. 03:17

1. 탄생



부처님은 히말라야 기슭의 작은 부족국가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나셨다. 왕비 마야부인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작은 구릉에서 아기를 낳았다. 여기가 바로 룸비니이다. 룸비니는 지금도 부처님의 탄생설화와 유적을 간직한 채 네팔 정부 그리고 네팔 승려와 티벳 승려들에 의해 수호되고 있다.
그리고 룸비니에서 서쪽으로 14∼15Km 지점에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바스투가 있고 거기서 남동쪽 10Km 지점에 석가족의 도시와 승원터가 남아있는 피프라하와가 있다.





2. 성장



마야부인은 태자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태자는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부인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이 분이 뒷날 최초의 비구니가 된 여성이다. 태자는 정신과 육체가 비범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를 가르친 스승들은 한결같이 그의 총명과 지성에 압도 당하곤 했다. 아름다운 야쇼다라와 결혼도 했으므로 부왕인 슛도다나 왕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론 여전히 불안했다. 태자의 성격이 극히 명상적이고 도무지 현실적인 것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왕은 태자가 태어나고 찾아왔던 아시타 선인의 말이 늘 마음에 걸렸다. "이 분은 세속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출가하면 대법왕인 부처님이 될 것이다. 슬프다. 나는 늙어 그 때를 볼 수 없으니."라고 한 말이었다.

카필라 왕국은 몹시 강대한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라는 젊고 유능한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3. 출가



대개의 불전작가들은 태자의 출가를 "미리 예정되어 있던 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처리방식이라면 태자의 고뇌가 인간적으로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다. 불교가 철저하게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발달해온 만큼, 태자의 출가를 이해하는 우리들의 태도 역시 싯달타의 정신적 고뇌를 이해하려는 개인사적 시각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한다.



태자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불소행찬』의 서술들이 비교적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농경제에서의 충격", "나무 아래서의 명상", "사문유관" 등이 태자의 고뇌와 출가 동기에 대한 대표적인 얘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수행의 편력



기원 전 6세기, 부처님의 생존 시에 마가다 왕국은 갠지즈 강 중류에 강력한 제국의 기초를 건설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새로운 종교가 꽃을 피운 시대였다. 인도 3대 종교의 하나인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도 이 시기에 바이샬리에서 태어났다.



부처님의 출가행로는 이 마가다국의 서울 라자그리하를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수많은 선지식을 만났지만 대표적인 수행자는 아라라 칼라마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다. 그들은 각기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들에게서 수행의 기초와 정신상의 여러 가지 단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의 학설이 초기 경전에는 자주 등장한다.





5. 성도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태자의 고행상"이 보여 주는 것처럼 부처님은 지독한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라자그리하를 떠나 가야의 산에 머물고 계셨다. 결국 그는 고행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함께 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로부터 빠져 나왔다. 뒷날 "양 극단에 머물지 말라"고 가르친 가르침도 이 때 얻으신 경험이었다.



전정각산을 거쳐 나이란자라 언덕에서 수자타의 우유죽으로 정신을 차린 후 보드가야 큰 보리수 아래를 수행처로 삼고 보편적인 수행생활로 들어갔다. 좌선의 명상법이었다.
어느날 새벽별을 보며 의심이 없는 확실한 경지에 도달했다.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어 부처가 된 것이다. 동·서학자들이 "지고한 통찰력"이라고 부르는, 인류의 교사로서 명실상부한 성자의 안목을 얻으셨던 것이다. 부처님의 일생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 대목에 대한 경전의 서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내게 지견智見이 생겼다. 나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애이고 이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은 이미 다하고 청정한 수행은 이루어져 소작도 죄도 다 가려졌네. 다시 유有를 받지 않으며 진여를 알다." <불타 석가모니>

"더러움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더러움의 흐름은 모두 멎었다. 이 이상 태어나는 길을 따르지 않으리.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고 이름한다." <잡아함, 열반경>





6. 최초의 설법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은 여행을 떠나 녹야원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동료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행하신다. 드디어 법왕의 법이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보드가야에서 녹야원이 있는 바라나시까지는 240여 Km, 당시 여정으로는 짧은 거리가 아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다음에도 정진을 계속하셨으며,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설법 여행을 계속했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은 너무나 개혁적이어서 법문을 받아들이기에 누구나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7. 죽림정사와 기원정사



현존하는 건물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에 관한 유적은 여러 지방에 걸쳐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교단사적인 측면에서 라지기르의 죽림정사와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죽림정사는 승단 최초의 정사로 의의가 크며 입멸 후 이곳 근처에서 최초의 경전 결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기원정사는 부처님의 고향이 가까운 인도 중북부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스물다섯 번의 우기를 지내셨다. 또한 이곳은 당시 코살라국의 서울로 아요드야, 코삼비, 카필라 등 부족국가를 예속시키고 있던 정치중심지였다.



아함경의 대부분 경전이 여기에서 설해졌고 우리가 수지독송하는 금강경을 비롯해 수많은 경전이 기원정사에서 탄생되었다. 7세기 중국의 현장 삼장이 이곳을 순례했을 때만 해도 승려와 가람으로 활기찬 곳이었으나 12∼13세기 이교도의 침입으로 퇴락, 지금은 유적의 형태만 스리랑카와 버마 승려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8.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합리적이어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일어나므로 해서 이것이 일어난다는 '연기론'은 세계를 이해하는 중심 테마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열반 즉 평온 에 이르는 네 단계의 성스런 관찰을 통해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삶, 바른 정진, 바른 생각, 바른 선정을 실천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합리적 사고로 출발하고 이성적 비판을 거쳐 완전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말씀들은 매우 쉽고 간결하며 다양하다. 이것은 민족과 사상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이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융화적인 태도이다. 불교는 생명력 있는 사고만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9. 열반



길에서 길로, 오직 법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맨발로 걸었던 부처님에게도 육체의 죽음은 다가오고 있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1년은 공교롭게도 출가의 여정을 되짚어 오는 것이었다. 망고나무 우거진 언덕에서 바이샬리를 돌아보며 "아난아 이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라고 예언하셨다. 가르침이 세계로 뻗어나간 부처님의 열반은 매우 조용하고 평화스럽게 이루어진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씀을 남기시며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신다.
화장하고 나온 사리와 숯은 일곱 나라의 왕과 한 사람의 바라문이 각기 자기 나라로 가져가 탑을 모셔 봉안했다. 바이샬리의 마지막 안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법문도 그렇거니와 열반경에 기록된 마지막 말씀은 매우 짧고 간결한 것이었다.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업적>

석가모니는 성도(成道)한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에 잠겨 있었으나
범천의 간절한 권청이 있어 설법을 결심하였다. 그 후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을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다. 이때 자신은 입멸(入滅)을 예언
하고 여러 가지 말을 남겼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하여 수행하라.”“슬퍼하지 말아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 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니라.
제행(諸行)은 필히 멸(滅)하여 없어지는 무상법(無常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없이 정진
하여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석가모니의 사후, 그의 유해는 다비(화장)되고,
그 유골(사리)은 중앙 인도의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이 건립되었다.

 

출처 : 초월적인 지혜검
글쓴이 : 천룡팔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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