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의 이해/세계종교 자료1.

[스크랩] 이집트 종교

美人完成 2008. 10. 13. 03:25
 



*이집트


이집트의 왕과 신들과의 관계

왕은 신들 가운데 하나가 인간으로 성육신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처음에는 매의신인 호루스(Horus)가, 나중에는 태양신인 레(Re)가 인간으로 변한 것으로, 신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한 왕들은 이집트를 노메스라고 불리는 지역을 구분했고, 각 노메스마다 주 도시의 신전에서 숭배하는 고유의 신이 있었다. 신적인 존재로 군림.


피라미드- 왕의 영혼이 내세를 위해 승천할 때 사용될, 천국으로 이어지는 계단들이었다. 이 내세에서 왕은 창공을 가로지르는 매일매일의 보트 여행에 태양신 레(Re)를 동반.

테베- 아문레= 아문+레, 최고신.

오시리스와 이시스- 페 84-5.

오시리스-왕이 죽으면서 되는 신- 불멸의 삶과 풍요를 주는 신-태양신을 대신한 최고의 신, 새로운 왕- 매의 신인 호루스

내세관- 암호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나일계곡의 지하세계로 생각, 저승에 도착하면 각 사람의 양심은 죽음의 신인 아누비스의 저울대 위에서 심판, 양심이 깃털보다 가벼우면, 의롭다 선포되어 내세의 왕국으로 인도받아, 가족과 친구들을 재회, 유쾌한 삶을 산다. 양심이 무거운 영은 사나운 괴물에 의해 찢겼다.  

사자의 서- 이생과 내생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개념들을 이해에 중요. 죽은 자에 영혼이 불멸의 삶을 돕기 위한  대한 장례예식. 영혼의 세 요소-카, 바, 아크. 아케나톤- 그의 아내 네페르티니, 유일신 아톤신 숭배


이집트의 역사 <history of Egypt>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이집트 역사.


【고대】 〈선사시대〉 이집트가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금석병용기시대를 경유하여 역사시대(왕조시대)로 이행된 것은 확실하다. 이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플라이스토세(世)는 자연경관(自然景觀)도 왕조시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유럽 빙하기(氷河期)의 영향으로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교대로 왔으나 그 무렵의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현재의 하곡지대가 아니라 주로 서방의 대지(臺地)였다. 아슈르기(期)․무스티에기․솔뤼트레기 등에 속하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나일강에 형성된 단구(段丘) 위나 파이윰호(湖), 하르가 등의 오아시스 주변의 높은 지점에서 발견된다. 중기까지의 문화가 이집트 전토(全土)에 걸쳐 동일한 데 대하여 후기에 이르러서는 파이윰 지방에 에피 르발루아 문화, 하르가 오아시스의 아테리안 문화 등의 지방색이 나타났다. 이 시대의 북아프리카는 다우습윤(多雨濕潤)에서 건조(乾燥)로의 이행기(移行期)에 해당한다. 중석기시대(中石器時代)를 거쳐 신석기시대로 접어들 무렵에는 건조화가 진전되어 나일강의 수위(水位)도 내려가고 자연환경도 현재와 비슷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차차 나일하곡에 모여 정주하였으며, 농경․목축을 영위하면서 왕조시대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대체로 BC 5000년경의 일이다. 이 시대의 유적은 카이로 서남 80 km에 있는 파이윰(A) 문화, 중부 이집트 동안(東岸)의 델 타사 문화가 알려져 있는데 반정주(半定住)의 상태이며, 농경과 수렵이 반반이었다. 토기․석기․골각아기(骨角牙器)․바구니세공[籠細工]․직물․피혁제품․팔레트(화장접시)․꾸미개[裝身具] 등을 가지며, 이미 상․하 이집트에서 각각 그 특징이 나타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신석기시대의 후기에 속한다. 이에 뒤따르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는, 상(上)이집트에서는 바다리 문화, 하(下)이집트에서는 메림데 문화가 알려져 있다. 바다리에서는 고타(敲打)에 의한 것이고, 주조법(鑄造法)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초의 구리제품이 발견되었으며, 토기가 현저히 발달했다. 경제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시나이․누비아산(産)의 공작석(孔雀石)이나 홍해산(紅海産)의 조개, 시리아산의 삼목재(杉木材) 등이 수입되었다.

〈선(先)왕조시대〉(BC 3600?~BC 3100?) 국가의 형성에 직접 연결되는 중요한 시대이며, 암라(나카다 Ⅰ)문화․마아디(Maadi)문화․게르제(나카다 Ⅱ)문화 등이 있다. 인공관개(灌漑)가 도입되고, 인구는 증가하고, 촌락은 도시 규모로 되었다. 왕조시대의 노모스[州]의 기초가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이다. 외국과의 교역도 더욱 왕성해졌는데, 특히 아시아산(産) 은․연(鉛)․자수정․흑요석(黑曜石)․청금석(靑金石)이나 메소포타미아산 원통인장(圓筒印章) 등이 수입되었다. 토기나 호부(護符)에 토템을 나타내는 동물이 그려져 있는데, 후세의 하트호르와 닮은 우두(牛頭)의 여성도 보인다. 무덤에는 우샤티브를 연상시키는 인형이 부장되었으며, 후장(厚葬)의 풍습이 엿보인다. 게르제기(期)에는 노동의 분화와 신분의 차가 보이며, 파상 파수토기(波狀把手土器)․유문토기(有文土器), 프린트제(製)의 정교한 손칼(刀子)이 한창 만들어졌다. 게르제기의 히에라콘폴리스의 무덤에는 석회칠이 되어 있고, 그 위에 갖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어, 왕조시대에 성행한 벽화의 조형(祖型)을 이룬다.

〈초기 왕조시대〉 제1~제2왕조(BC 3100?~BC 2686?) 국토의 통일과 건설의 시대인 게르제기(期)의 말에 상․하 이집트의 각 노모스는 차차 통합되었고 곧이어 남북으로 서로 적대하는 두 개의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쌍방이 함께 왕가와 같은 종족의 귀족에 의하여 지배되었는데 처음에 하이집트는 부토, 상이집트는 히에라콘폴리스를 수도로 하였다. 그 뒤 북은 사이스, 남은 티니스(티스)로 옮겼다. 한때 북왕국이 남왕국을 지배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남왕국이 전국토를 지배하였다. 이 통일에는 스코르피온, 나르미아 두 왕이 활약하였는데 그 기록은 히에라콘폴리스에서 발견된 석회암제(石灰岩製)의 곤봉두(棍棒頭)와 봉납용(奉納用)의 팔레트에서 볼 수 있다. BC 280년경 이집트의 신관(神官) 마네토는 상․하 이집트를 처음으로 통일하였고, 새로이 멤피스를 축조한 제1왕조 초대의 왕은 메네스였다고 하나, 그것은 나르미아와 동일인물인 것 같다. 이 통일은 BC 3100년경에 이루어졌다고 짐작된다. 마네토에 의하면 제1왕조는 8명의 왕, 제2왕조는 9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400년에 걸친 초기 왕조시대에 관하여는 채광(採鑛)을 위한 시나이 원정과 누비아 토벌 이외에는 거의 분명하지 않다. 국왕과 그 가족은 아비도스와 사카라에 매장되었는데 그곳에서의 출토품이 당시 문화의 한 면을 나타낸다. 왕묘는 마스타바의 형태를 취하였다. 󰡐신(神)이 되는 왕󰡑에 의한 통치사상이 널리 퍼졌으며, 국가의 조직이나 토목․건축의 기술도 크게 진보하였다. 문자도 이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으며, 석제용기․동제품(銅製品)․귀금속․보석 가공 등의 공예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고왕국시대〉 제3~제6왕조(BC 2686?~BC 2181?) 이집트 최초의 융성기로서 각 방면으로 이집트 문명이 가진 여러 특징이 나타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특징있는 피라미드가 건설된 시대로 피라미드시대라고도 불린다. 수도는 멤피스로 옮겨졌다. 제3왕조의 조제르왕은 카이로의 남서쪽 30 km 사카라에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에 묻혔다. 이것은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으로서 처음으로 돌을 사용하였고, 외관(外觀)은 마스타바를 6단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이것은 피라미드의 과도적(過渡的)인 것으로서 높이 62 m, 북쪽의 장제전(葬祭殿)을 비롯하여 부근에는 의식용 건물과 열주랑(列柱廊)․광장 등이 있으며, 이것을 높이 약 10 m, 전장(全長) 1,600여 m의 주벽(周壁)이 남북으로 직사각형으로 둘러싼 피라미드 복합체를 구성한다. 제4왕조의 왕 스네프루는 3개의 피라미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다슈르의 북쪽 피라미드는 저변 213 m, 높이 97.5 m의 각추형(角錐形)으로 된 최고(最古)의 피라미드이다. 기제에는 3개의 큰 피라미드가 솟아 있다. 모두 제4왕조의 것으로, 북쪽에서부터 쿠푸․카프레․멘카우레의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저변 230 m, 높이 146.5 m이고 2.5 t의 큰 돌을 230만 개 쌓아올린 것이다. 북쪽으로 난 입구에서는 길고 복잡한 통랑(通廊)을 통하여 매장실에 이르는데 도굴(盜掘)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에는 장제전 이외에 하곡(河谷)신전과 그곳으로 통하는 참배길이 부수되어 있다. 또한 유명한 스핑크스는 국왕의 얼굴형을 닮았다고 한다. 피라미드는 제5~제6왕조에서도 계속 축조되었다. 그러나 규모는 작아졌으며, 그에 대신하여 태양신 라를 제사하는 대규모 신전이 건설되었다. 제5왕조 최후의 왕 우나스의 피라미드 내부에는 최초로 피라미드 텍스트(매장용의 呪文)가 새겨져 있다. 각 왕의 업적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시나이 반도의 구리 광산이나 누비아 지방의 채석장을 확보하고 때에 따라서는 양재(良材)를 구하기 위해 시리아로, 또한 향료를 구하기 위하여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제5왕조에는 영토가 제2폭포 와디할파까지 넓혀졌다. 그러나 제6왕조에 접어들자 왕권은 약체화되고 각 노모스의 지사(知事)가 그 직위를 세습하게 됨으로써 왕명은 힘을 잃고 노모스는 반독립국과 같이 되었다. 고왕국시대에 국왕은 파라오라 불리고 절대적 전제군주로서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재판관․군인․신관 등의 모든 면에서 최고위의 존재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였다. 왕은 왕족 중에서 고급관리를 선임하여 중앙집권정치를 하였다. 소수의 도시 생활자 이외의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이며 그 밖에 전쟁노예가 있었다. 당시의 생활은 분묘의 벽면에 새겨진 부조(浮彫)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종교는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국가의 행사나 예술에까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의 종교는 원래 수목․암석․동물 등 자연물이나 생물에게 초인간적인 힘을 인정하는 주물(呪物)숭배였다. 그것이 곧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서, 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신(化身)하였다. 예를 들어 호루스 신은 매, 하트호르 신은 암소, 아누비스 신은 늑대였다. 원래 이것들은 각 부족의 토템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지방신으로서 받들어졌고 성수(聖獸)로서 신전에서 사육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후장(厚葬)되었다. 이러한 신 가운데에서 태양신 라는, 전 우주의 창조자로서 점차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집트인은 태양의 운행이나 수목의 번식에서 생명의 불사(不死)․부활을 믿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거나, 내세의 생활을 위하여 특히 왕이나 귀족이 훌륭한 분묘를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건축기술과 기하학이 진보하였고, 또 농업과 관련하여 토지 측량과 점성술이 발달하였으며, 달력이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텍스트는 종교적 주문(呪文)이나 신화의 단편(斷片)으로 되어 있어, 이 시대의 신앙을 아는 데 귀중한 사료(史料)이다.

〈제1중간기〉 제7~제10왕조(BC 2181?~BC 2050?) 제6왕조 말부터 왕권은 쇠미하였고, 노모스의 지사는 세습화되어 봉건군주와 같이 되었다. 한편 관료정치에 강한 반감을 품어오던 민중이 봉기하여, 사회는 혼란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의 분열과 혼란에 편승하여 사막으로부터는 이민족(異民族)이 침입하였다. 일시적으로 질서가 회복되기도 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았으며,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문학이 번성했던 것밖에는 일반적으로 학문․미술이 모두 쇠퇴한 불모의 시대였다.

〈중왕국시대〉 제11~제12왕조(BC 2050?~BC 1750?) 제1중간기의 말, 북의 헤라클레오폴리스에 웅거한 제10왕조에 대하여 테베에 웅거하는 안테프의 제11왕조가 독립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오랜 항쟁 후에 이집트는 멘투호테프 2세 치하에서 다시 통일되었다. 이후 테베는 약 1,000년 동안 이집트의 정치․종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장기간 방치되었던 누비아에 원정하여 콥토스에서 와디 함마마트에 이르는 도로를 정비하고 시나이 반도와 푼트 지방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는 테베의 서쪽 교외 델 엘 부하리의 벼랑에 붙은 새로운 양식의 장제전(葬祭殿)을 건설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통일을 유지할 힘이 없어 국내는 한때 혼란하였으나 최후의 왕 때의 재상 아메넴헤트 1세가 제12왕조를 열었다. 이 무렵부터 테베의 시신(市神)인 아몬신(神)이 유력해졌다. 아메넴헤트 1세의 아들 세소스트리스 1세는 제3폭포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금광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세력은 여전히 강하였다. 노모스의 세력을 장악하고 참된 의미에서 국토통일을 완성한 것은 세소스트리스 3세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북상하는 니그로를 토벌하여 누비아를 지배하였고 각처에 성채(城砦)를 설치하고, 팔레스티나에 원정하였다. 이 시대의 교역은 시리아․크레타에까지 미쳤다. 다음의 아메넴헤트 3세는 국내의 정치에만 힘썼는데, 특히 댐과 관개용수로를 만들었고, 파이윰 지방을 개척하여 경지의 증대에 성공하였다. 제12왕조의 왕들은 파이윰의 북동에 있는 리셰트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리셰트․하와라 등지에 피라미드나 신전이 조영되었다. 이 시대는 민중이 귀족에 대신하여 힘을 얻어 관리에 등용되었고 농노에서 자유민으로 되는 길도 열리는 등 이집트의 역사 가운데서 비교적 민중의 힘이 인정되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앙상에도 나타나 사후의 세계는 왕이나 귀족들의 독점물이 아니고, 민중들도 미라가 되어 공동묘지에 매장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 종교․문학면에서도 피라미드 텍스트에 대신하여 관(棺)의 주위에 표시된 코핀 텍스트는 일반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중왕국시대는 일반 문학(산문)이 가장 발달한 시대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最古)의 모험기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에의 이야기》는 이집트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 그 밖에 푼트 교역을 취급한 《난파선 이야기》와 사회적 관심을 나타낸 《능변의 농부 이야기》 등이 있다. 이것은 시대를 반영하고 서사(書寫) 재료로서 파피루스의 두루마리가 사용되었고, 서체도 쓰기 쉬운 행서체로 옮겨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밖에 파피루스는 《기하학서》(린도 파피루스) 《외과서》(에드윈스미스 파피루스) 《치병(治病)의 서》(에베루스 파피루스) 등 학술적인 것에까지 미치고 있다.

〈제2중간기〉 제13~제17왕조(BC 1750?~BC 1567?) BC 1750년경 제12왕조는 붕괴되고 이집트는 또다시 혼란의 시대로 들어갔다. 많은 왕이 교대로 즉위하였고, 때로는 병립하기도 하였다. 이 혼란을 틈타 아시아에서 힉소스인이 침입하여, 삼각주지대의 아바리스에 성채를 구축하고 약 100년 동안 주로 하(下)이집트를 지배하였다. 이것은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에 의한 지배이다. 힉소스의 침입은 당시의 서아시아에 일어난 민족이동의 일환이었고 문화 정도는 이집트에 비해 훨씬 낮았으나, 그들은 말과 전차를 도입하여, 그 이후의 전술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BC 1600년경이 되자 테베를 중심으로 하여 제17왕조의 제왕(諸王)에 의한 반항이 기도되어 장기간의 항쟁 끝에 카흐모스왕의 아우 아모세가 아바리스를 함락하고 결국 힉소스를 아시아로 추방하였다. 그는 귀국 후, 아모세 1세로서 제18왕조를 일으켰다.

〈신왕국시대〉 제18~제20왕조(BC 1567?~BC 1085?) 이 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고왕국․중왕국에 이어지는 세 번째의 융성기로, 영토도 아시아까지 확대되어 제국시대라고도 불렸다. 제18왕조 초기의 국왕들은 힉소스를 추방한 후에도 계속하여 팔레스티나 방면으로 파병하였는데 그것은 곧이어 전리품을 목적으로 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변하였다. 당시의 서아시아 정세는 각 민족이 분립․항쟁하는 시대였다. 곧 이집트도 그와 같은 국제정세 속으로 말려들어갔다. 한편 투트모세 1세는 제3폭포까지 파병하는 등 남방(南方) 경영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트7수트 여왕은 내정에 힘쓰고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푼트 지방에 배를 보내어 향료(香料)․상아(象牙)․목재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테베 서쪽 교외의 델 엘 부하리에 거대한 장제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여왕과 공동통치를 하였던 투트모세 3세는 여왕의 사후,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카데시의 왕이 지휘하는 동맹군과 메깃도에서 싸웠는데 그 승리가 이집트 번영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왕의 출병은 20년간 전후 17회에 이르렀고 북은 유프라테스강(江) 연안에서 남은 제4폭포까지 지배하에 두게 되어 이집트의 영토는 사상 최대가 되었다. 방대한 전리품과 많은 노예를 얻게 되었고 각지에서 물자가 집결되었으며, 미탄니․아시리아․크레타 등이 조공하였다. 따라서 테베에는 웅장한 신전․왕궁, 귀족의 저택․상점 등이 들어서 번화하였다. 귀족은 충실한 가신(家臣)으로서 왕을 받들었으며, 그들을 고급관리로 하는 관료조직이 정비되었다. 투트모세 3세는 이제까지 한 사람이었던 재상을 두 사람으로 하여 상․하 이집트의 내정에 전념시켰다. 원정으로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강력한 상비군(常備軍)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직업군인이 출현하였고 곧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용병의 수가 많아지자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큰 문제로 되어, 이것은 국력을 피폐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승리는 신의 힘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신 자신의 승리이며, 국가의 번영은 아몬신의 번영이라고 생각되었다. 국왕이나 귀족은 신에게 토지를 기증하고 신전을 잇달아 건립하였다. 따라서 신관단(神官團)은 관료․군인에 못지 않은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방대한 신전령(神殿領)은 신관의 사복을 채웠고 곧이어 왕위계승에도 간섭하였다. 투트모세 3세의 사후 시리아에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아멘호테프 2세는 미탄니를 토벌하였고 다음의 투트모세 4세는 미탄니와 동맹하여 그 왕녀를 왕비로 맞았다. 이 무렵부터 아시아에서는 히타이트의 세력이 신장하였는데, 이집트도 그 동향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시대는 표면상으로 이집트가 가장 안정되고 융성한 시대였다. 왕은 거의 외정(外征)을 하지 않고 다만 신전 등의 건축공사에 부(富)와 힘을 쏟았다. 왕은 아시아제국과 서한 및 기증물을 교환하여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여기에 일종의 국제주의시대가 도래하였다(아마르나시대). 아멘호테프 4세는 절대 세력을 갖게 된 테베의 아몬신관단에게 반발하여, 태양신 아톤을 시신(市神)으로 하는 신도(新都)를 오늘날의 텔 엘 아마르나의 땅에 조영하여 아케타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으로 명명(命名)하고 스스로도 이크나톤이라고 개명하였다. 왕은 아톤찬가(讚歌)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아시아에서는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고 정정(政情)이 불안하게 되었다. 결국 왕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아 사후에 아몬신앙은 부활되었으며 신도(新都)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예술면에서는 고정화된 종래의 전통이 타파되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외국과의 문화교류도 행하여져서, 사실적이고 밝은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낳았다. 이것은 투탕카멘 왕묘의 출토품에서 엿볼 수 있다. 투탕카멘 왕은 18세 때 죽고 군인출신의 호렘헤브가 왕위에 즉위하여, 제18왕조는 끝났다. 제19왕조의 초대는 호렘헤브가 선택한 군인 출신의 람세스 1세이고, 그의 아들 세티 1세는 재차 아시아에서의 이집트의 우위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그의 아들 람세스 2세는 전형적인 파라오로 67년 동안의 오랜 치세에, 각지에 다수의 신전을 건축하였고 북쪽 또는 남쪽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아시아 경영 때문에 신도를 삼각주지대의 타니스에 건설하였다. 건축 사업 중에는 테베의 서쪽 교외에 세운 장제전 라메세움이나, 누비아의 아부심벨의 대소 2신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남하하는 히타이트를 카데시전투(BC 1286)에서 막아냈고, 곧이어 아시리아의 세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하투실리시 3세와의 사이에 우호조약을 맺었다. 왕은 그 후 아시아 진출을 단념하였다. 다음의 메르엔프타흐왕 시대부터 아시아는 또다시 민족이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고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 때 이미 히타이트는 멸망하여 없어졌고 이 무렵부터 삼각주지대는 자주 리비아인 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또한 신관단의 세력에 대하여, 왕실의 세력은 쇠퇴하여 왕위는 신관(神官) 헤리호르에게 찬탈되었다. 신왕국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테베에 조영된 카르나크․룩소르 등의 많은 신전과 여러 왕의 장제전, 그리고 테베 서쪽 교외의 벼랑을 뚫고 매장한 국왕과 귀족․고관의 연도분(羨道墳)이다. 이것은 모두 엄청난 부와 권력, 그리고 풍부한 노예노동력에 의한 것이지만 높은 수준의 건축기술과 벽면의 부조(浮彫)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예술상의 재능은 오늘날에도 그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 문학은 구어체(口語體)를 사용하여 민중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농민의 생활을 묘사한 《두 형제 이야기》, 교훈적인 작품 《정의와 허위의 이야기》 등이 있고 이외에도 고관의 분묘에 남겨진 자전적(自傳的)인 묘비명(墓碑銘)․전승가, 아몬신․아톤신의 찬가, 격언(格言)․연가(戀歌)도 남아 있다. 또 《사자(死者)의 서》를 비롯한 종교적인 작품도 있다.

〈후기 왕조시대〉 제21~제30왕조(BC 1085?~BC 332) 테베에서 헤리호르가 왕위를 찬탈할 무렵, 북부에서는 네지바다두트(스멘데스)가 타니스에 제21왕조를 열어 이집트는 양분되었다. 그 후 리비아 출신의 일족이 중부 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폈으며 곧이어 시샤크(셰숑크)는 삼각주지대의 부바스티스를 근거로 제22왕조를 일으켰다. 그 후의 제23․24왕조는 리비아인이 지배하였는데 분립의 기운은 삼각주지대까지 미쳐, 제22․제23왕조는 병립하였다. 제25왕조는 나파타에서 일어난 에티오피아인의 왕조이다. BC 671~BC 664년 이집트는 세 번에 걸쳐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테베는 두 번 점령되었다. BC 664년 프삼메티코스 1세가 삼각주지대의 사이스에 제26왕조를 열었다. 그는 그리스인의 힘을 빌려 아시리아인을 추방하고 삼각주지대를 통일, 곧 남부에까지 손을 뻗쳤다. 왕은 그리스인들의 삼각주지대에서의 식민(植民)을 허용하였으므로 곧 나우크라티스가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고왕국시대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복고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사이스왕조는 한때 예술면에서도 우수한 복고적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네코 2세는 카르케미시에서 신바빌로니아에 대패하여 세력을 잃었다. BC 525년 페르시아의 캄비세스에 의하여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한 속주가 되었다(제27왕조). 그 후 한때 이집트는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모두 짧은 기간으로 재차 페르시아의 세력하에 놓여 졌으며 결국 BC 332년 정복되어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시대는 끝났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 (BC 305~BC 30)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빌론에서 죽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왕이 임명한 이집트 태수(太守) 클레오메네스를 추방하고 스스로 신왕조를 건설하였다. 신왕조 밑에서 이집트는 재차 번영을 되찾았다. 왕은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고 학자․상인․공장(工匠)․용병(傭兵)을 그리스에서 이주시켜 이곳을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 때문에 유리와 금속공업이 발달하였고, 각지와의 무역도 성행하였다. 또한 아카데미나 부속의 대도서관을 세움으로써 학예면에서도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국토의 지배에 있어서는 이집트 종래의 노모스를 단위로 하는 통치기구를 그대로 물려받아 장관에는 그리스인을 임명하였다. 그리스어(語)가 공용어로 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종래의 토착어가 사용되었고, 종교면에서도 많은 외국풍의 신들이 이집트로 도입되었으나, 그 이름이 이집트 고래의 신의 이름에 적용되는 데 그쳤다. 몇 개의 대신전이 이 시대에 건립되었으나 신전에 새겨진 왕들은 이집트왕의 칭호를 채용하였고, 그 이름은 카르투슈(王名額子)에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 문명이 도입되었다고 하지만 얼마 안 되어 그리스세계와의 접촉도 차차 적어졌기 때문에 결국 이집트의 체질을 개선하지 못하였다. BC 30년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사망으로 끝나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제국치하〉 (BC 30~641) BC 30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이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치하를 포함하여 약 700년 동안,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였다. 그 동안에 이집트는 로마에 대한 곡물과 기타의 공급원의 역할을 하였다. 농민의 생활은 고통스러웠으며, 특히 로마제국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탈취는 극심해졌다. 그 때문에 도망자가 늘고 국유지는 황폐하여 점차 대토지 소유자에게 옮겨갔다. 297년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이집트를 몇 개의 주(州)로 분할하였다. 로마인은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행정․재정․사법을 그대로 채용하여 정책면에서도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것을 발전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공용어로 채용되었으나 일반 민중에게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철학․문헌학․종교학․수학․공학․의학 등이 크게 발전하여 학예분야에서는 지중해에서 중심적 존재였다. 그리스도교도 밀라노 칙령의 포고와 함께 이곳에서 발전하였다. 특히 이집트인은 미술분야에서 그것을 꽃피웠는데 아라비아인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도를 콥트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미술을 콥트미술이라고 한다. 그것은 특히 이집트 북부를 중심으로 5~6세기경에 번영하여 건축․조각․회화․공예(자수․직물․도기)에서 뛰어났다.

【이슬람시대】 〈아랍족 지배시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단결된 아라비아인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은 640년 초에 아무르 이브눌 아스가 거느리는 약 4,000명의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넘어 현재의 구(舊)카이로 지방에 있었던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바빌론성(城)을 포위한 데서 비롯된다. 이어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여 대략 641년 말까지는 정복이 끝났다. 당시의 이슬람교국의 수도는 아라비아의 메디나였으며 제2대 칼리프 우마르가 총지휘하였다. 아라비아인은 바빌론성이 있던 곳을 푸스타트라 하였고 이곳을 이집트 지배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이로부터 우마이야왕조를 거쳐 아바스왕조에서도 이집트는 사라센제국의 한 주(州)로서 취급되었고, 역대의 칼리프가 파견하는 총독이 푸스타트에 주재하여, 세금을 모아서 중앙정부에 송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 총독들은 임기가 짧아서, 이집트의 토지가 농민들의 노력으로 산출하는 부(富)는 시리아․이라크에 흡수되고 이집트 그 자체의 번영을 위해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독립왕조시대〉 아바스왕조의 한 총독인 투르크족 출신의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형식상으로는 동왕조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독립국을 이루면서부터 형세는 일변하였는데 이집트의 부(富)는 그 땅에 축적되어서 번영을 더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를 툴룬왕조(868~905)라 부르며, 푸스타트의 북동부(현재는 카이로시의 일부)에 아르카타이라는 구역을 만들어 이곳을 지배의 중추부로 삼았다. 그 후 잠시 아바스왕조의 지배로 돌아갔다가 같은 투르크계의 아흐시드왕조가 이집트뿐만 아니라 시리아도 지배하였다. 그러나 969년 서방으로부터 침공해온 파티마왕조에게 멸망되었다. 파티마왕조는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와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아들 하산의 혈통이라고 하며, 이슬람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를 신봉하였다. 파티마왕조는 원래 튀니지에서 건국하여, 북아프리카 일대에 세력을 폈는데 제4대의 무이즈 때에 이집트를 공략하고 시리아와 아라비아의 일부도 합하였으며, 알카히라성(城)을 조영하였다. 이것이 카이로의 기원이며, 그 성문(城門)과 성벽 일부를 비롯하여, 현재도 남아 있는 건축물이 많이 있다. 이 왕조의 군주는 칼리프라고 하며, 동으로는 아바스왕조와, 서로는 코르도바의 후(後)우마이야왕조와 대항하여 오랫동안 3개의 칼리프제국이 정립하였다. 사상․문학에 있어서도 정통파(수니파)와 상용되지 않는 점이 많으며, 또한 해상무역도 성행하였으므로 이 시대부터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는 이라크의 번영을 서서히 능가하게 되었고 카이로는 이슬람 세계에서 경제적․문화적으로도 최고의 수준을 나타냈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 내부 동요를 거듭하여 쇠퇴하였고, 아이유브왕조로 인하여 멸망되었다. 아라비아인이 처음으로 이집트를 정복했을 무렵 이집트 주민의 대부분은 그리스도교도였다. 지배계급인 그리스인은 그리스정교(正敎)를 신봉하였고, 토착의 이집트인은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에 의한 콥트교회에 속하였는데, 이것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아라비아인의 지배시대에 들자,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자가 해마다 증가하였다. 정복 후 200년 정도 지나서 9세기에는, 콥트교도가 이슬람교도보다도 적어졌다. 이슬람화와 더불어 아랍어화(語化)도 신속하게 진전되어 콥트어나 그리스어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현재는 2,000만 명 정도의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콥트교도는 100만여 명에 지나지 않아 거의 전주민이 이슬람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십자군(十字軍)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으로 유명한 살라딘이 파티마왕조에 대신하는 아이유브왕조(1169~1250)를 세우면서부터 이집트는 다시 이슬람의 정통파로 돌아갔다. 그 뒤 투르크계․시르카시아(코카서스가 본토)계의 노예병 출신의 군벌이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맘루크왕조이며, 바흐리 맘루크(1250~1390)와 부르지 맘루크(1382~1517)의 2기로 구분되지만 몽골군이나 십자군과의 싸움 이외에 정권쟁탈의 내전도 많았으나 한편으로는 인도양이나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하여 시리아까지 지배하였다. 그러나 인도항로의 발견에 따라 포르투갈에게 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1517년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셀림 1세에게 정복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맘루크군벌 중에서 잔존된 것도 많았다.

〈투르크제국 지배시대〉 유럽인의 동방 신항로 발견 등에 따라, 이집트는 동서 교통의 중계지로서의 중요성을 잃게 되어, 세계의 한 변경으로서 쇠퇴하였고, 문화적으로도 침체를 계속했다. 투르크제국의 지배력도 점차 약화되었고, 맘루크 귀족의 세력이 부흥하여, 그들의 과두정치(寡頭政治)가 행하여지게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거느리는 프랑스군이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맘루크 귀족의 군대를 피라미드싸움에서 격파하고 23일에 카이로에 들어왔다. 프랑스군의 점령은 1801년 9월까지 계속되었으나, 그 동안에 프랑스인의 이집트 연구, 아랍족의 유럽 문화와의 접촉 등에 의하여 새 시대를 맞이하는 새로운 장이 열렸다.

〈근대〉 프랑스군의 철수 후, 투르크제국의 지배하에 되돌아갔으나 맘루크 귀족의 잔존분자는 카이로로 돌아가 실권을 장악하여, 혼란이 계속되었다. 투르크 정부가 파견한 알바니아인 부대의 대장 무하마드 알리가 1805년부터 파샤(太守)가 되어, 11년 맘루크 귀족을 일소하고 실권을 쥐어, 이집트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명목상으로는 투르크의 속주(屬州)였으나 실제상으로는 독립왕국이었던 것은 옛날의 툴룬왕조나 아흐시드왕조와 같았다. 무하마드 알리 이후에, 자손이 계승하였고 5대째의 이스마일 때에 하디우(副王)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왕조는 차차 재정난에 빠졌고, 영국․프랑스 등의 세력이 침투하여 왔다. 한편 민족 사상도 고취되어, 81년 아라비 파샤 등의 봉기가 있었는데, 이들이 영국군에게 진압됨으로써 영국의 점령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투르크제국의 주권은 배제되었고, 영국의 보호하에 놓이게 되었다. 부왕(副王) 아바스 힐미가 퇴위하고, 그 숙부인 후사인 카밀이 술탄으로서 괴뢰정권을 만들었다. 그러나 영국의 보호국이 된 뒤부터 민족 독립의 기운은 더욱 격화하여, 자그루르 파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와프드당이 중심이 되어 노력하였으며, 22년에는 일단 영국의 보호권 정지를 쟁취하였다. 그리하여 영주(英主) 푸아드 1세(재위 1922~36) 치하에서 영국의 속박을 벗어나, 36년에 우선 완전에 가까운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 해, 푸아드의 아들 파루크가 왕위에 올랐으나 영국의 수에즈 운하지대 주둔병을 철퇴시키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전쟁(1948~49)에 패한 것 등도 중요한 원인이 되어, 52년 7월 민족사상으로 단결한 소장 장교들의 정변이 일어나, 파루크는 국외로 추방되고, 53년 6월 나기브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이 되었는데 54년에 J.A.나세르가 그 뒤를 이었고, 70년 9월에 사망하자 M.A.사다트가 대통령을 승계하였으나 81년 10월 과격파 회교도에 의해 피살되자 무바라크 부통령이 국민투표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87년 10월 재선되었다. 


이집트의 문자 1 <Egyptian script>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문자. 서체에 따라 ① 신성문자(神聖文字:히에로글리프), ② 신관문자(神官文字:히에라틱), ③ 민중문자(民衆文字:데모틱)의 3종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한자의 해서체․행서체․초서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성문자는 상형문자이며 고대 이집트의 전 기간을 통하여 사용되었다. 주로 신전의 기둥이나 벽면, 오벨리스크 등에 음각하였으며 왕의 기념물이나 종교관계 서적 등에 사용하였다. 채색된 것도 많으며 예술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신관문자는 신성문자의 윤곽을 흐트려서 주로 파피루스 등에 흘려 쓰는 데 사용하였다. 민중문자는 BC 8세기 이후 일반인이 일상생활에 사용한 것이다. 이들 문자는 대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해 가로쓰기한다. 세로로 쓸 경우도 오른쪽에서부터 읽는다. 왕명(王名)은 카르투슈라고 부르는 액자 속에 써 넣었다. 이집트문자는 회화문자에서 발달한 것이며 원래 그 문자가 표시하는 대상물을 의미하는 표의문자였다. 그것이 후에 음만을 표시하는 표음문자가 되었다. 표음문자에는 둘 이상의 음을 가지는 음절과 일자일음의 알파벳이 있다. 이집트문자에는 모음 기호가 없으므로 어떻게 읽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집트 문자 2 <Egyptian language>

나일강 유역에서 쓰이던 고대 이집트어. 셈함어족(語族)에 속한다. 고대 이집트인을 함인(人)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집트어도 함어(語)를 모체로 하고 셈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프리카의 함어에 대한 고대 문헌이 없어 함어와의 관련은 분명하지 않다. BC 5000년 초부터 나일강 하류지방에서 생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문헌자료는 BC 3200년경에 출현하였다. 고왕국(古王國)시대를 중심으로 사용된 고대 이집트어(BC 3000~2200년경)의 대표적 문헌으로는 《피라미드 텍스트》가 있다. 이 언어가 중기(中期) 이집트어로 발전하였는데, BC 23세기경부터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는 정자법(正字法)이 정리되고 어휘도 풍부한 격조높은 작품을 내놓음으로써 고전어(古典語)로 인정되었다. 또한 시제(時制)가 단순하고, 일정한 어순이 엄격히 지켜지며 조동사와 접속사가 없고 서술이 정적(靜的)인 한편 회화적(繪畵的)인 문자의 성격으로 철학적․추상적 표현이나 정서적인 뉘앙스를 표현하는 데는 부적합하였다. 그러나 명쾌한 문체, 엄격한 리얼리즘, 강력한 대구법(對句法) 등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게 되었다. 종교문서 등은 이 언어의 전통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는데, BC 16세기경부터 새로운 언문일치체(후기 이집트어:BC 1550~700경)가 나타났다. 이때는 시제도 복잡해지고 조동사도 많이 사용되어 대중문학적인 것을 다수 탄생시켰다. 중기 이집트어와 이 언어와의 관계는 고전중국어와 현대중국어와의 관계와 비슷하다. BC 7세기경부터 데모틱(Demotic:BC 700~AD 400년경)이 나타나 계약문서 등에 많이 쓰였다. 3세기경에 나타난 콥트어(2~17세기경)는 그리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 언어로 된 문헌에는 그리스도교와 관계되는 것이 많다. 시대적으로는 데모틱어에서 콥트어로 이어지지만 언어의 성질 면에서는 두 언어가 모두 후기 이집트어에서 파생되었다.


피라미드 <pyramid>

돌 또는 벽돌로 만들어진 방추형의 건조물.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멕시코 등 각지에서 건조되었다.

【이집트】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와력(瓦礫)의 산으로 변한 것과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세의 기록도 다소 남아 있다. 근세에 이르러 천문대설․창고설 등 공상적․신비적인 해석도 가해졌으나, 학술적으로는 나폴레옹 원정 때 조사단에 의한 《이집트지(誌)》가 돋보인다. 19세기 말 이래 피트리, 보르하르트, 라이스너 등의 조사로 과학적 해명이 이루어졌다.

〈기원〉 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타바에서 발전된 것으로, 제18왕조 초에 왕묘가 암굴묘(岩窟墓)의 형식을 취할 때까지 계속된다. 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最古)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 변이 63 m인 직사각형 석조 마스타바로, 중앙에 깊이 28 m의 수혈(堅穴)을 파고 그 밑에 매장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확장공사가 시작되어, 결국 마스타바를 6단 포개놓은 모양의 밑변 109×126 m, 높이 62 m의 계단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헬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존재했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彼岸)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죽은 국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태양신과의 결부는 후의 정통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한층 긴밀해졌다. 피라미드 그 자체는 왕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음식물과 가지각색의 물품을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는 장소도 필요했다. 그래서 피라미드 북측에 장제전(葬祭殿)이 건조되고, 다시 동쪽에 세드제(祭)의 의식을 행하는 신전․소신전․중정(中庭)이, 남쪽에는 제단이 있는 대중정이 축조되고 그것들을 높이 10 m, 동서 277 m, 남북 545 m의 사가거형의 주벽(周壁)으로 둘러 장대한 묘소를 형성하였다. 이것들을 󰡐피라미드 복합체󰡑라고 부른다.

〈제4왕조〉 측면이 평면인 정통 피라미드는 제4왕조로 들어와 출현한다. 초대인 스네프루왕(BC 2600~?)은 3개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메이둠의 것은 현상이 2단탑의 모양이나, 본래는 8단의 계단 피라미드를 만들고, 단의 부분을 메워서 정통 피라미드로 완성시킨 것이다. 일설에는 제3왕조 말, 프니왕이 착수하고 스네프루왕이 완성시켰다고도 한다. 높이 92 m, 밑변은 144 m, 사면(斜面) 각도는 51 °52 '이다. 다음에 사카라의 남쪽 다흐슈르에는 높이 97.5 m, 밑변 189 m, 사면각도는 처음에는 54 °32 ', 중간쯤에는 43 °21 '이 되는 󰡐굴절(屈折)피라미드󰡑와 높이 97.5 m, 밑변 213 m, 사면각도 43 °36 '인 경사가 완만한 󰡐북(北)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제4왕조로 들어오자 장제권은 피라미드의 북측에서 동측으로 옮겨지고, 사막가에 새로이 하곡신전(河谷神殿)이 만들어져 양자는 참배로(參拜路)로 이어졌다. 다음 왕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제5왕조 이후〉 5․6왕조에는 피라미드의 규모가 작아졌다. 아부시르․사카라에 있는 양 왕조의 것은 65~80 m의 밑변은 가진 것이 많다. 그 중 제5왕조 최후의 왕인 우나스의 것이나, 제6왕조의 페피 1세, 메르엔라, 페피 2세의 것에는 매장실 벽면에 왕의 사후 행복을 기원하는 각종 주문, 소위 󰡐피라미드 텍스트󰡑가 일면에 새겨져 있다. 제7왕조의 이비왕을 마지막으로 피라미드는 일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제11왕조에 이르러 다시 나타났다. 제12왕조에 속하는 리슈트에 있는 아멘엠헤드 1세, 센우스레트 1세의 것, 일라훈에 있는 센우스레트 2세의 것, 하와라에 있는 아멘엠헤트 3세의 것이 유명하다. 그러나 규모도 작고, 또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심하게 파괴되었다.

〈건조법〉 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核材)․내장재․전재(塡材)․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나파타․메로에의 피라미드】 수단의 나파타와 메로에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전자는  BC 8~BC 7세기의 나파타왕국의 것으로 18기, 후자는 BC 3세기 이후의 것으로 약 50기가 있다. 물론 분묘로서 어느 것이나 사면각도가 아주 급한 것이 특징이다.

【라틴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있는 피라미드는 멕시코 올메카문명의 중심지인 라벤타 등지에 나타난 것이 가장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라벤타의 피라미드는 80×140 m의 저부(低部) 위에 점토를 굳혀 만든 4면의 측벽이 있다. 연대는 BC 5세기라 생각되며, 그보다 약간 내려오면 멕시코 중앙고원에 석조로 된 쿠이쿠일코의 피라미드가 나타나고, 기원 초기에 개화한 테오티우아칸의 종교도시에서는 태양․달․케찰코아틀신(神) 등에게 바쳐진 거대한 피라미드가 속속 건조되었다. 이 3개 중 최대의 것은 󰡐태양의 피라미드󰡑로 밑변이 약 200 m, 높이 65 m나 된다. 또, 테오티우아칸의 영향을 받은 몬테알반․카미날후유 등에도 피라미드군이 형성되었다. 카미날후유 이후의 마야문화에서는, 특히 피라미드는 신전을 구축할 때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멕시코만의 엘타힌에는 많은 니치(niche:壁龕)로 장식된 피라미드가 축조되었다. 피라미드는 그 후 톨테키 문화․아스테크 문화에도 계승되어 특히 후자의 중심지인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티)․틀라틸코․촐룰라 등에 건설된 대피라미드 등에 대해서는 정복자였던 에스파냐인들도 경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앙아메리카의 피라미드는 공의(供儀)와 예배가 거행되는 신전을 지키기 위한 거대한 기단(基壇)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마야문화의 팔렝케의 󰡐법률 피라미드󰡑의 발견에서 볼 수 있듯이 기단으로서의 피라미드 내부에 고위층 인사들의 매장이 있던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안데스 지방에서는 피라미드의 발달은 주로 고전기(古典期)라 불리는 기원 전후에서 수백 년의 문화개화기 이후에 한정되어 있다. 페루 중부해안인 라스알다스와 같은 농경개시기의 피라미드도 있으나, 본격적인 진흙벽돌로 쌓는 대피라미드 구축은 모치카문화를 중심으로 한 페루 북해안의 많은 골짜기의 문화개화기에 성행했다. 같은 무렵 남부 안데스의 티아우나코 문화에도 흙을 쌓아올린 피라미드가 나타나 있다. 페루에서는 석조 피라미드는 거의 볼 수 없다. 또, 최후의 잉카기(期)에는 피라미드는 별로 축조되지 않고, 겨우 해안지방의 파차카막의 대신전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안데스의 피라미드도 그 정상에서 공의와 예배를 보았던 것 같다.    


이집트의 신화

기원전 수천 년의 먼 옛날로부터 기원 전후에 이르기까지 나일강 유역에서 번영을 누린 고대 이집트인(人)의 신화. 이집트는 로마나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정복당하여 멸망하였지만, 피라미드나 신전(神殿)과 같은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은 예로부터 종교와 관계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 유적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 프랑스인(人) J.F.샹폴리옹이 1822년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인 성각문자(聖刻文字)의 해독해낸 데 이어, 그 후 각문(刻文)이나 파피루스 문서의 해독과 연구가 급속히 진전되었고, 그에 따라 고대 이집트인의 정신생활에 관해 상당히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인의 신앙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사후(死後)세계에 관한 것인데, 그에 의하면 인간은 죽어도 그 혼(魂:바)은 죽지 않으며, 사후세계로 가서 때때로 원래의 육신으로 돌아오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육체는 미라로 만들어 묘소에 정중히 모셔졌다. 혼이 사후세계로 가는 과정이나 사자(死者)의 신(神) 오시리스 앞에서 선악 판정의 저울에 올려지는 과정은 《사자의 서(書)》라는 종교적 문서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자연이나 동물, 또는 여러 가지 관념을 모두 신으로 보는 다신교(多神敎)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주요한 것은 《사자의 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밖에도 지방에 따라 대소(大小)의 신들이 존재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숭배되고 있었다.

【창세신화】 고대 이집트의 유물에는 바빌로니아의 창세신화나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같이 체계적인 기록은 없지만, 각지에 있는 신전의 각문 등에 어렴풋이나마 세계의 시초와 신들의 계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중에도 헤르모폴리스․헤리오폴리스․멤피스․부시리스(그리스식 발음) 등의 도시에는 독립된 신학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재구성된다. 원초에는 눈이라고 불리는 바다가 있었고 여기에서 아툼이 태어났다. 이는 태양신 라와 동일시되는데, 눈은 나일강물이라고 여겨진다. 아툼 라는 스스로의 수정작용(受精作用)으로 게브․슈․테프누트․누트를 낳았다. 이 4명은 서로 다툰 끝에 게브는 대지가 되고 슈와 테프누트는 공기와 증기(蒸氣)가 되었으며, 막내 누이동생 누트는 하늘이 되었다. 그리고 게브와 누트는 부부가 되어 오시리스와 이시스라는 남매를 낳았다. 이들은 오시리스 신화의 주인공이다. 또한 태양신 라의 숭배는 헤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고대 이집트 전기간에 걸쳐 성행하였는데, 여기에는 호루스(매의 신)의 숭배가 수반되어 왕권의 확립 및 계승과 관련이 있다.

【오시리스 신화】 이 신화는 그리스의 저작가 플루타르코스에 의하여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근친결혼을 하여 이집트를 28년간 통치하였으나, 동생인 세트(그리스식 이름으로는 튜폰)에게 살해당하여 시체는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다. 상자는 델타를 지나서 지중해로 흘러들어가 시리아 해안의 비블로스에 닿았다. 비탄에 잠긴 이시스는 이 상자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비블로스에 당도하였다. 오시리스를 담은 상자는 비블로스에 도착한 후 무화과나무가 이를 에워싸 크게 되었다. 비블로스의 왕은 이 나무로 궁전의 기둥을 만들었으나 이시스가 이를 알고 그 상자를 되찾았다. 이 사실을 안 세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14토막으로 토막 내어 온 나라에 뿌렸다. 이시스는 다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흩어진 오시리스의 시체를 모아다가, 누이동생 네프티스의 도움을 받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켰다. 그리고 생명을 되살리는 의식(儀式)을 행하였으나 오시리스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있어 사자(死者)의 나라의 왕이 되었다. 남편의 시체와 상관하여 이시스가 낳은 호루스는 세트와 싸워 마침내 이겨 상․하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좋아하였고, 오시리스 신앙은 농경의례(農耕儀禮)와 결부되어 성행하였다.

【다신교의 신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크나톤 지배하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다신교가 성행하였기 때문에, 많은 신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숭배되었으며, 제각각 그 유래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하피(나일강의 신)와 같은 자연신이나 아누비스(늑대 모습의 주검의 신)․바스테트(고양이의 신)․세베크(악어의 신)와 같은 동물신도 있고, 후세에 와서 이집트의 주신(主神)이 된 아몬처럼 유래가 분명치 않은 것도 있다. 또한 그리스인에 의해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된 사랑의 신 하트호르, 헤르메스와 동일시된 기예신(技藝神) 토트(이집트 이름은 제프티)처럼 원시의 단계를 벗어난 이집트인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도 꽤 많이 있으며, 때로는 장대한 신전에 모셔져 융숭한 숭배를 받고 있었다. 멤피스를 중심으로 숭배되었던 푸타하도 이에 속하고, 공예의 신으로서 그리스인에게 헤파이스토스와 동일시되었으며, 성우(聖牛) 아피스를 비롯한 동물숭배는 꽤 넓은 범위에 걸쳐 찾아볼 수 있다. 이 신들의 성격과 경력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인들에 의해 전해지는 것도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도 많다.


이집트의 미술


구석기시대 이후 로마시대에 이르는 고대 이집트 미술은 BC 3100년경 제1왕조가 성립된 시대부터 점차 원시적 단계를 벗어나 제4~5왕조시대에는 이미 고전적 양식을 보여줄 정도로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제12왕조, 제18~19왕조, 제26왕조 등의 시대에는 특히 그 활동이 눈부셨다. 이집트인은 옛날부터 자연현상이나 동물 등을 신으로 숭배하였고, 또 내세(來世)를 믿어 사자(死者)를 후장(厚葬)하였다. 예술은 이와 같은 종교관에 입각하여 영원성을 조형화(造形化)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견고한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져서 불변불후를 이상으로 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종교교의(敎義)가 일단 정해지면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양식도 수천 년에 걸쳐 지극히 미미한 변화밖에는 없었다.

【건축】 건축의 유구(遺構)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묘와 신전이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건축상 주목되는 최초의 분묘형식은 왕조 성립기 전후에 나타난 마스타바(아랍어로 걸상)라는 왕과 귀족의 묘로서, 처음에는 지하에 현실(玄室)과 그 부속실을 만들고 지상의 상부구조에 몇 개의 방을 두어 부장품을 넣었으며, 그 위를 양건(陽乾) 벽돌로 쌓아올려 직사각형의 대(臺)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마스타바는 고왕국시대에 들어와서 귀족의 묘로 발달하여 현실은 땅속 깊숙이 파고들어간 수혈(竪穴)에 접하여 만들고 상부구조의 측면은 경사가 져서 사다리꼴을 이루었으며 그 안에 영혼만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과 예배소, 조상실(彫像室)을 배치하였다. 제3왕조의 조세르왕은 사카라에 6단의 마스타바를 쌓아올린 형태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구축하였다. 제4왕조부터 왕의 분묘는 정사각형 추형(錐形) 피라미드가 된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북쪽부터 쿠푸․카프레․멘카우레 등 왕들의 것인데,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5 m, 평균 2.5 t의 돌이 230만 개나 쓰인 것으로 추정되고, 현실은 석축(石築)의 거의 중앙에 있다. 이러한 피라미드는 정사각추의 석축과 예배소, 나일강변의 신전, 예배소와 신전을 연결하는 지붕 덮인 낭하 등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 및 3세의 분묘는 테베의 델 엘 부하리에 있으며, 마스타바에 피라미드를 얹은 형태이다. 제12왕조의 왕들은 파이윰에 피라미드를 세웠으며, 그것은 규모가 작고 재료도 양건벽돌이었다. 중왕국시대에 중(中)이집트 등 사막이 나일강 가까이까지 뻗은 지방에서는 귀족의 분묘를 절벽 중턱에 설치하였다. 신왕국시대 왕들의 분묘는 테베의 󰡐왕가의 계곡󰡑에 횡혈식으로 만들어졌고, 도굴에 대비하여 입구는 비밀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위한 장제전(葬祭殿)은 멀리 떨어진 사막의 대지 끝이나 평지 위에 세워졌다. 델 엘 부하리에 있는 하트7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경사진 길로 연결된 3개의 단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데, 중정(中庭) 둘레에 콜로네이드(列柱)를 세운 형식으로, 배경을 이루는 단애의 경관과 잘 조화되고 있다. 람세스 2세의 장제전인  라메세움,  메디네트  하부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장제전 등은 사자와 함께 신들이 모셔져 있었으므로, 그 설계는 신전과 거의 비슷하였다. 신전에는 고왕국시대의 것으로 제5왕조의 태양신 󰡐라(Re/Ra)󰡑의 신전형식이 밝혀져 있으며, 상하가 압축된 모양의 오벨리스크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중왕국시대의 신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은 신왕국시대 및 말기의 것이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신전형식은 카르나크(테베)의 콘수 신전에서 볼 수 있다. 양쪽에 스핑크스가 늘어선 참배도(參拜道)가 끝나는 곳에 오벨리스크를 전면에 세운 탑문(塔門)이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뜰이 있고 좌우에 별주랑(別柱廊)이 있다. 뜰 안쪽에 현관이 있으며, 그 곳을 지나면 다주실(多柱室)이 된다. 다주실 안쪽은 신관(神官)이나 왕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특별한 날에 콘수 신상을 얹어 나르는 성주(聖舟)를 격납(格納)하는 방과 그 밖의 방이 있고, 가장 안쪽 벽에 붙은 콘수 신상을 안치하는 방을 중심으로 3개의 방이 있다.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 룩소르의 신전 등은 규모도 크고 형식도 복잡하지만, 부분적인 요소는 콘수 신전의 형식과 다름없으며, 다만 이것을 확대하거나 반복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이 형식은 덴데라․에드푸․필라에 등 말기의 신전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또한 사막이 나일 강변까지 근접한 지방에는 신전의 대부분 또는 일부를 단애 속으로 파들어가서 만든 암굴신전․반암굴신전도 있다. 아스완 댐의 건조에 따라 절단(切斷)하여 이전한 아부심벨의 신전은 전자의 예이다. 분묘나 신전이 석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세워진 데 반하여 세속건축은 주로 양건 벽돌이나 목재 등을 사용하였다. 제18왕조의 이단왕(異端王) 이크나톤이 천도하였던 수도 텔 엘 아마르나에서는 정궁(正宮)과 이궁(離宮), 고관의 저택, 새 수도 건설에 종사한 기술자의 집합주택 유구(遺構)가 발견되었다. 이집트 건축의 특징이 되는 기둥의 형식을 보면, ① 네모난 기둥에는 여신 하트호르의 두부(頭部)를 주두부(柱頭部)에 부조(浮彫)한 것(하트호르 기둥)과 수의(壽衣)를 입은 왕의 상(像)을 그 앞에 세운 것(오시리스 기둥) 등이 있으며, ② 원주(圓柱)에는 8면 또는 16면 등으로 이루어진 프로트 도리스주(柱)와 각종 식물(야자․연꽃․파피루스)을 모티프로 한 것 등 여러 형태가 있다.

【환조】 환조(丸彫)에는 신상(神像), 신전이나 분묘에 안치된 왕과 귀족의 조각상, 부장품으로 만든 소형 인물상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 재료는 돌․금속․나무․상아․도기 등이다. 석재는 섬록암(閃綠岩)․화강암․각력암(角礫岩) 등 경질의 암석과 석회암․사암․앨러배스터(설화석고) 등 연질의 것이 있으며, 금속은 주로 동과 청동이고, 목재는 아카시아․무화과나무 등의 이집트산 이외에 침엽수의 수입재를 많이 사용하였다. 왕조 전 시대와 초기 왕조시대에는 그다지 단단하지 않으면서도 정교하게 조각할 수 있는 상아조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정교한 대형 조상은 분묘형식이 발달하여 예배소에 조상실을 설치하고 사자(死者)의 상을 안치하게 된 고왕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상에는 사자의 영혼이 머무른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체 각 부분 중에서도 특히 얼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왕국시대에는 제세르왕 좌상(제3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이 등신대 묘상(墓像)으로는 최초의 것이며, 라호테프, 네페르트 부부의 좌상(제4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채색이 아직도 선명하고 옥안(玉眼)이 영롱하여 현실감이 넘친다. 카프레왕 좌상(제4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견고한 섬록암으로 된 당당한 조각으로서 품위와 위엄이 가득한 최고 걸작의 하나이다. 멘카우레왕과 왕비의 입상(제4왕조:보스턴미술관 소장)은 매우 경건한 느낌을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상 열거한 것은 왕과 왕족의 조상으로, 왕실의 공방(工房)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 밖에도 사설 공방에서 만들어진 사인(私人)의 조상 중에도 뛰어난 것이 많다. 가발을 붙인 것과 붙이지 않은 것 등 두 가지가 있으나 얼굴이 몹시 닮은 라노펠 입상(제5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 정력적인 50대 남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카펠 입상(제5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 당시 식자층으로 존경을 받은 서기(書記)의 모습을 조각한 묘상 중에서는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기좌상(제5왕조) 등을 걸작으로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석회암이나 목재 등으로 만든 것은 일반적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두발은 흑색, 남자의 피부는 적갈색, 여자의 피부는 담황색, 옷은 백색으로 칠해져 있다. 중왕국시대에는 북쪽의 멤피스계(系)와 남쪽의 테베계 작품을 각각 식별할 수 있다. 북방계의 조각은 고왕국시대의 세련된 작풍을 계승하여 기교적으로 뛰어나지만, 약간 도식적이면서 섬약한 인상을 준다. 리셰트에서 출토된 세누셀트 l세 좌상(카이로), 하와라에서 출토된 아멘엠헤트 3세 좌상(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 등이 그 보기이다. 남방계의 조각은 지방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칠고 힘찬 작풍에 멤피스의 기교를 받아들여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였다. 다얄 알 바하리 출토의 세누셀트 3세 입상(카이로)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고왕국시대 말기부터 하인 소상(下人小像)을 부장(副葬)하던 풍습은 중왕국시대까지 계속되었으나, 중왕국의 하인 소상은 전대와 같이 돌로 된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몇 가지 예를 제외하면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신왕국시대의 조상에는 새로운 포즈도 채택되고 양감(量感)이나 선이 세련되어 우아한 작품이 많아진 반면, 표현이 형식화되어 차갑고 생기가 덜한 것이 흠이다. 제18왕조 초기의 작품은 다분히 중왕국의 작풍을 남기고 있으나 하트7수트 여왕 무렵부터 점차 새로운 기법이 나타나서 백관(白冠)을 쓴 투트모세 3세 입상(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남달리 무용(武勇)이 뛰어난 왕이었지만 매우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신왕국시대에는 거상(巨像)의 제작이 많아졌는데, 아멘호테프 3세와 왕비 티의 좌상(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그 선구적인 작품이다. 아멘호테프 4세 무렵에는 투철한 사실주의가 풍미하여 왕의 추한 신체적 특징을 표현한 작품이 나타날 정도였으나, 왕이 이크나톤이라 개명(改名)하고 텔 엘 아마르나에 천도한 후부터 크게 누그러져서 왕비 네페르티티 흉상(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과 같이 세련된 작품이  나타났다. 제19왕조에는 람세스 2세의 입상처럼 기교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생기를 잃은 작품이 만들어졌으며, 또 왕이 여러 신전에 봉납한 거대한 자상(自像)은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될 만한 것은 못되었다. 제21~25왕조에는 왕비 카로마마의 입상(루브르미술관 소장)과 같은 기교적 작품만이 나타났으나, 제25왕조 무렵에는 사실적인 남자상이 만들어졌다. 제26왕조에는 일반문화와 보조를 맞추어 미술도 복고적인 경향을 띠면서 고왕국시대의 작품을 많이 모방하였으나, 결국은 냉랭한 형식화에 그치고 말았다. 프톨레마이오스시대부터 로마시대에는 이집트 양식과 그레코로만 양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조상도 만들어졌다.

【부조․회화】 고대 이집트의 부조와 회화는 신전․분묘 등 건조물의 벽면을 장식하고, 또 비석이나 관․궤(櫃) 등의 이면을 꾸미는 데 이용되었다. 이 밖에 특수한 것으로서 석회암 파편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기도 한 오스트라콘, 파피루스의 두루마리 그림 등이 있다. 회화는 물론이고 부조도 여러 색으로 채색되었다. 주요한 안료는 대자(代)의 적색, 황토의 황색, 감청석(紺靑石)의 청색, 공작석의 녹색, 그을음의 흑색, 백악(白堊)이나 석고(石膏)의 백색 등이었고, 그것을 아교․수지․달걀 흰자위 등에 개어서 사용하였다. 부조와 회화의 표현은 공통적으로 인물의 얼굴이 반드시 옆을 향하게 하고, 눈과 어깨는 정면을, 복부는 거의 옆, 다리는 완전히 옆을 향하게 했다. 이는 인체의 각 부분에 대한 관념을 종합한 관념상으로서 종합하는 방법에 일관성이 없어 프리미티브(primitive) 예술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의 부조에는 신전에 봉납하기 위해 만든 팔레트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나르메르왕의 남북 이집트 통일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나타낸 화장용판(化粧用板)이 특히 유명하다. 제3왕조의 헤시라의 목제 패널(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윤곽이 정확하고 살붙임의 기법이 미묘하다. 제5왕조시대에는 민간의 분묘가 발달하여 예배소의 벽면에는 생존시의 윤택하였던 생활이 내세에도 계속되도록 비는 여러 즐거운 정경이 조각되었다. 사카라의 티의 분묘(제5왕조)에는 집 안에서 일하는 각종 기술자나 농부․뱃사공 등 집 밖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묘사해놓았다. 회화에서는 메둠에서 출토된 오리의 그림(제4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이 깃털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어 벽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벽화는 중왕국시대의 중부이집트 호족의 묘에도 그려진 것이 있으나 현재의 보존상태는 좋지 않다. 신왕국시대부터 그레코로만시대를 포함한 말기에 걸쳐 조영된 신전이나 장제전의 벽면에는 수많은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이 경우, 일반 예배자에게 공개되는 부분에는 왕의 전기적(傳記的)인 주제가 다루어지고, 은밀한 부분에는 왕이 신들을 예배하고 신들이 왕에게 은총을 내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레코로만시대의 부조는 둥그스름한 느낌을 주고 윤곽이 유연하게 표현되어 인체의 해부학적 정확성을 잃고 있다. 분묘벽화는 신왕국시대 테베의 왕릉이나 귀족의 분묘에 그려진 것이 많고, 오늘날에도 선명한 색채로 전하는 작품이 많다. 레크미라․낙트․멘나 등지의 분묘벽화가 그 좋은 예이다. 아마르나시대에는 왕실 가족의 단란한 장면과 아톤 신앙에 연관된 새나 짐승의 모습 등 특색있는 주제가 다루어졌다. 파피루스의 두루마리 그림에는 사자(死者)가 위험한 저승길을 여행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주의사항을 모은 《사자의 서(書)》 등이 있다.

【공예】 공예품으로는 석기를 비롯하여 도기․금세공품․목공예품․섬유제품, 짐승의 엄니[牙]나 뿔로 만든 물건, 피혁제품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주요한 것을 들면 석기로는 선왕조시대 후기의 프레이킹 기법에 의한 수석제(燧石製) 소도(小刀)가 특히 뛰어나며, 석제 용기로는 선왕조시대에 견고한 돌로 만든 그릇과 왕조시대의 반투명한 앨러배스터 제품(製品)이 매력적이다. 토기는 선왕조시대 후기의 것이 조형적으로나 장식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도차(陶車)는 제1왕조 무렵부터 사용된 듯하다. 유약(釉藥)은 협의의 선왕조시대 이전인 바다리기(期)의 석태(石胎)에 이미 나타나 있다. 이것은 선왕조시대에 들어서면 인공적으로 마련된 듯한 석영분말의 태(胎)에 응용되었으며, 이 도기는 왕조시대에 계속 발달하여 기물(器物) 이외에도 분묘에 부장하기 위한 인형이나 동물상․우샤브티(使役用人形)․부적류 및 타일 등의 건축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유약은 알칼리질로서 빛깔은 청색․녹색․보라․백색․황색 등이었다. 유리 제품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제18왕조시대의 유품이 전하며 그 가마터가 테베와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로마시대 이전까지는 유리공예에서 샌드 코어(砂芯)기법이 사용되었다. 이집트에서 제일 먼저 이용된 일반금속은 동(銅)으로서, 그 기원은 BC 500년으로 거슬러올라가고, 서아시아에서 비롯된 청동이 보급된 것은 중왕국시대부터였다. 구리와 청동의 가공기법에는 단조(鍛造)․주조․금은피복(金銀被覆) 등이 있었다. 금은 일찍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그 세공기법도 놀랄 만한 수준이다. 많은 보석으로 장식한 금관과 금제흉식(金製胸飾) 등이 만들어졌는데, 제12왕조의 뛰어난 유품이 전한다.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예로는 제18왕조 투탕카멘왕의 금제관(棺)이 특히 유명하다.


사자의 서 (Book of the Dead, 死者-書)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세계(死後世界)의 안내서라고 할 수 있는 두루마리. 파피루스․가죽 등에 성각문자(聖刻文字:히에로글리프)․신관문자(神官文字:히에라틱)․민중문자(民衆文字:데모틱) 등으로 적어, 제18왕조 이후에 매장되었다. 사자(死者)는 사후의 세계에서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친다고 하는데, 그 경우에 외는 주문(呪文)이나, 신(神)들에 대한 서약에 대하여 적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來世觀)을 아는 데에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지만, 그 중에서도 사자의 심판을 취급한 대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기원은 매우 오래되어, 이와 비슷한 문장은 고(古)왕국시대의 피라미드 텍스트나, 중(中)왕국시대의 코핀 텍스트 등에서 볼 수 있다.


출처 : 푸른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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