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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아~~애틋하고 슬픈 사랑아~~~ < 불국사의 종소리 >~~~

美人完成 2008. 10. 28. 23:12
애틋한 사랑의 설화가 있는 북국사와 석굴암~~~
안녕하세요 ? 오늘은 신라의 고도 경주랍니다..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한두번쯤은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하며 무수한 사연사연이 있는 경주~~~ 많은 유적지 중에서 오늘은 불국사와 석굴암 2 군데만 사진 담아 보았습니다..2008 년 9 월 28 일 풍경이니까 지금쯤은 단풍으로 매우 화려할듯 하네요..시간이 있으시다면 어떨까해서랍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세계인들이 많이 찿아 오는 그야말로 불국사는 부처님의 화엄장엄세계인 불국토를 현세의 사바세계에 화현시킨 열정적인 신앙의 완성체랍니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비롯 수많은 국보문화재와 보물문화재가 있고 매년 수백만의 내외국인 방문객들이 한국의 뛰어난 불교예술작품들이 자리한 불국사를 구경키 위해 찿아오신답니다.. 과거의 뛰어난 불교문화재 뿐만 아니라 현재의 불국사는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계시고 한국불교의 지혜의 맥을 이어가는 중심적인 수행처이기도 하구요.. 또한 불국사는 한국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의 전시관으로서 세계에 한국불교와 한국의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1600년 한국불교 수행정진과 지혜의 도량으로서 오늘도 끊이지 않는 용맹정진의 푸르른 서기가 흐르고 있는 곳이 바로 불국사랍니다.. 5천년 장구한 세월동안 발전해온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로 천년세월 너머 현대의 무지한 중생들에게 불국토의 장엄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불국사 앞으로도 영원히 잘 지키고 돌 보아야 하겠습니다.. 불국사 전문 자료 인용합니다..아래글입니다~~~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금창기(불국사 창건에 관한 최고의 기록)는 문헌적인 근거가 약해 불국사가 일정 기간에 창건되기 보다는 긴 세월동안 여러세력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의 일반적 견해이다. 이러한 불국사의 거대가람으로서의 위용은 1593년 5월 의병과 승군의 활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왜군의 방화와 파괴등으로 큰 피해를 입어 2,000여 칸의 대가람이 전소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후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불국사도 국가의 지원 및 스님과 신도들의 노력에 의해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중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와중에 유물의 완벽한 복원과 보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제의 문화정책의 전시물로서 수난을 겪었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주춧돌과 빈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 · 관음전 · 비로전 · 경루(經樓) ·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 극락전 · 범영루(泛影樓) ·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여기서부터는 불국사의 창건 김대성 이야기가 다음과같이 전해져 온답니다.. 김대성은 큰 머리와 넓은 이마를 가지고 태어났다. 어렸을때 이러한 외모로 "큰 성"이라는 뜻으로 대성이라는 이름을 지엇다. 그는 시골마을에서 홀로된 어머니와 마을의 부자의 논에서 일을 하면서 살았다. 마침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작은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하루는, 흥륜사에서 종교적인 모임을 열기를 원하는 점개라는 스님이 마을로 내려와 보시를 요청했다. 그가 부자에게 요청복안이 베50필을 시주함에 점개가 축원했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수호하소서. 하나의 보시로 만 배를 얻고 안락하게 장수하소서”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 들어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문 밖에서 스님이 축원하는 것을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컨대 우리가 전생에 선한 일을 못했기에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인데, 지금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할 것이니,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하여 훗날의 과보를 도모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여 그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뒤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어,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다.”고 했다. 집안 사람들이 놀라 사람을 시켜 찾아보도록 하였더니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외침이 있던 때에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니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폈다. ‘대성’이라고 새긴 금패 쪽이 있어 또 대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어머니를 모셔다가 함께 봉양했다. 이미 장성한 대성은 사냥을 좋아하여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시비를 했다. “네가 어째서 나를 죽였느냐? 내가 도리어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 용서를 빌었다. 귀신이 말했다. “나를 위하여 절을 세울 수 있겠느냐?”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한고 꿈을 깨니 땀이 흘러 자리를 적셨다. 이로부터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그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를 세웠다. 이로 인하여 마음에 감동이 있고 자비로운 원력이 더욱 깊어 갔다. 그리하여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여 신림, 효훈 두 성사를 청하여 각각 거주케 하였다. 이 이야기가 얼마만큼이 사실인지 말하기는 어려우나, 신라 경덕왕 통치기간 동안 재상 김대성의 불사로 불국사가 지어졌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아참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애닯고 슬픈 무영탑 전설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랍니다 ..잘 아실 내용이지만 한번더 옛추억을 더듬으면서 읽어 보시면 애틋한 남녀의 사랑 간절해지는 이가을이 되지 않을까해서랍니다..^*^

백제의 최고 석공 기술자 아사달이 결혼후 얼마 안되어 사랑하는 부인 아사녀를 백제땅에 남겨두고 신라 불국사로 오게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울창한 소나무 숲에 가리운 불국사 쪽을 바라보는 아낙의 눈엔 어느덧 이슬이 맺혀 여윈 볼을 탄고 흘렸다. 멀리 백제 땅에서 지아비를 찾아 온 아사녀. 그리움에 지쳐 먼발치서 나마 남편의 모습을 보고자 신라 땅을 찾았으나 용이치 않았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며 못 속을 들여다봤다. 흐르는 것은 흰 구름뿐 남편 아사달도 그가 조성하고 있는 석가탑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숲 속을 바라보는 순간 아낙은 흠칫 놀랐다. 아사달의 얼굴이 환히 웃으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아낙은 불국사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치맛자락을 잡으며 난간에 앉아 있는 스님에게 다가갔다. 「 스님, 아무리 연못 속을 들여다봐도 그리 남편의 모습은 떠오르질 않습니다. 석가도 보이질 안구요. 스님, 어찌하면 아사달을 볼 수 있을까요?」 「아사녀. 그대의 애끊는 심정은 참으로 안타깝소 그러나‥‥」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뜬 스님은 합장한 채 애원하는 아사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님, 이렇게 미칠 듯이 그리워하는 저의 정성이 아직 모자라서인가요?」 아사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아사녀, 아사달을 만나려는 그대의 마음은 한 낮 오욕이 빛은 사랑 때문이오, 사랑은 고귀한 것이지만 오욕이 담긴 사랑은 영원할 수 없소. 그대는 자기를 버린 밝은 마음으로 불전의 탑을 조성하는 아사달의 지극한 정성을 따르며 아사달 보기를 기도 하오. 그러면 관음보살님의 은혜를 입을 것이오.」 법문을 들려준 스님은 조용히 일어나 경내로 들어갔다. 스님의 뒷모습에서 숭고함을 느낀 아사녀는 합장한 채 한참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둠이 내리면서 숲속을 울리는 맑고 경건한 목탁소리는 아사녀의 가슴을 더욱 조이게 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염불에 열중했다. 삼매에 든 그녀의 염불은 관세음보살이 아사달이 되고 아사달이 관세음보살이 됐다. 아스라해지는 의식 속에 그녀는 아사달을 일심으로 불렀다. 저녁놀이 지고 뒷산 절에서 범종 소리가 들려올 때면 아사녀는 동구 밖에 나가 아사달을 기다렸다. 「아사녀,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왜 예까지 나왔소.」 「집에서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옵니다. 늘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같아선 지아비 계신 곳으로 뛰어가고 싶은 것을‥‥」 홍조된 아사녀의 얼굴은 행복에 젖어 있었고, 그에 대한 아사달의 사랑은 흐르는 강물 같았다. 「아사녀, 곧 일이 끝나게 되오. 그때는 하루 종일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아사달은 또 떠나야 했다. 아사녀는 온 생애가 끝나는 것만 같았다. 「아사달-」아사녀의 애절한 부름은 어두운 숲 속으로 퍼져 나갔다가 다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아사녀는 메아리에 이끌리듯 숲 속을 헤맨다. 시냇물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다시 냇물을 거슬러 오르자 돌다리에 친 파수병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디를 가시오?」 「지아비 찾아 백제 땅에서 온 아낙 이옵니다. 제발 들어가게 허락해 주세요.」 「안되오. 절을 다 지을 때까지 잡인을 금하라는 어명이오. 여자는 더더욱 안되오.」 파수병은 그녀를 창대로 밀어냈다. 불국사 담을 끼고돌며 아사달을 애타게 부르던 아사녀는 담을 넘어 들어갔다. 석공들이 잠든 방을 두루 살피던 그녀는 불이 켜진 방 앞에 이르자 그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사달이 단정히 않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사녀! 아사녀, 어떻게 이곳에‥‥미칠 듯보고 싶었소. 」 「아사달! 얼마나 찾아 헤매었는지 몰라요.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기쁨과 슬픔이 엉켜 두 사람은 뜨거운 포옹을 했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그들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범종이 울리고 목탁소리가 잠든 절을 깨우자 아사달은 일말의 불안을 느꼈다. 「이대로 아사녀와 백제로 돌아갈까? 아냐, 공사가 곧 끝날 텐데, 그럼 지엄한 왕명을 어긴 죄는 어떻게 하나.」 아사달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사달,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혹시 제가 떠나야 하나요.」 「아사녀, 잠깐이오. 지금까지도 떨어져 살아왔소. 사람들이 알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 공사가 끝나도록 기다려주오.」아사녀는 아사달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흐느꼈다. 「아사녀, 지루하고 견딜 수가 없거든 절 앞 영지를 들여다보시오. 내가 쌓아 올리는 탑이 비치고 내 모습도 비칠 것이오.」 말을 마친 아사달은 방문을 열고 나가려했다. 아사녀는 울며 아사달의 옷깃에 매달렸다. 온힘을 다해 잡으려 했으나 아사달은 자꾸만 멀어져 갔다. 안타까운 아사녀는 있는 힘을 다해 아사달을 불렀다. 꿈 이었다 아사달을 부르는 소러에 소스라쳐 깬 아사녀의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맑게 가라앉은 연못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사녀는 못가로 다가섰다. 한걸음 다가서서 못 속을 들여다보고, 또 한걸음 다가가서 못 속을 들여다봤다. 어느덧 아사녀의 걸음은 빨라졌다. 아사달의 이름을 뇌이던 그녀는 못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면이 일렁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흩어졌다가 모아지고 다시 흩어졌다. 그 얼굴은 아사녀의 얼굴이 되기도 하고 아사달의 얼굴로 보이기도 했다. 아사달의 얼굴이 환히 웃으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아사녀는 두 팔을 들어 아사달을 불렀다. 그러자 아사달이 저만큼에서 팔을 벌리고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그녀를 휘감았다. 아사녀는 아사달을 부르며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사달을 부르는 애절한 외침이 수면으로 치켜 올랐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뛰어왔을 때 아사녀의 꿈과 사랑과 비원을 삼킨 영지는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했다. 수면엔 흰 구름과 숲을 안은 불국사가 비치고 있을 뿐 석가탑은 비치질 않았다. 아사녀의 슬픈 죽음을 전해들은 아사달은 아사녀를 부르며 못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후 석가탑은 영지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해서 무영탑이라 불리었다. 어떠하셨어요 ?? 슬픈 이야기 마음이 아려 오시지요 ?? 언젠가 경주 다시 찿게되면 내 기억해 주리라 새삼 다짐합니다.. 이곳 불국사 내부 불상 사진 촬영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어 이 사진으로 대신하렵니다..통제하는 이유 충분히 알겠구요.. 앞으로도 영원히 오래오래 우리의 후손에 후손 또 그 후손에 후손들이~~~아끼고 잘 보존해 물려주어야할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랍니다.. 석굴암 주차장 이곳까지 자동차를 타고서 쉽게 올라와 10 여분 걸어가면 석굴암이니 누구든 큰 불편은 없으실듯하구요.. 제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중학교 수학 여행때 새벽에 일어나 어두운 산길 오르면 피리 소리 처량히 들려오는데 힘들게 오르고 또 오르니 아침 태양이 동해 바다에서 떠오르는 그때 그풍경 아아~~잊을수 없었네요... 가을 단풍이 어디를 가든지 아름답겠지요..좋은 추억들 많이많이 가슴에 담아 오시기를 바래봅니다..행복하세요..들녘에서 씀..^*^

곡명 // Michael Hoppe ~~~Lincoln's Lament // ***곡명 참조하세요..미국에 남북 전쟁 당시인 1864 년 5 명의 아들을 잃고 슬픔과 실의에 빠져있던 한 어머니 앞으로 링컨 대통령이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로 감동을 받아 작곡된 곡 ..슬픈 노래..라는 뜻이랍니다..
출처 : ♬미리내 소리사랑♬
글쓴이 : 들녘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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