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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자연미의 결정체, 계룡산 도자기

美人完成 2008. 11. 29. 01:33

한국 자연미의 결정체, 계룡산 도자기

 

▲ 분청사기 중에서 계룡산도자기로 불리는 병과 작은항아리.
ⓒ 통도사 성보박물관
우리나라의 도자기를 간단히 세 종류로 요약하라면 고려의 청자, 조선 초의 분청사기, 조선의 전시대를 향유했던 백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중 분청사기는 분장(분 발랐다는 뜻)한 회청색의 사기(우리 조상은 자기를 사기라 부르기도 했음)라는 뜻으로, 분장회청사기의 준말입니다. 이 말은 일본인이 우리 분청사기를 미씨마(三島), 하게메(刷毛目), 고비끼(粉引)라고 부르던 것을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님이 우리말로 명명한 말입니다.

그리고 분청사기는 만든 지역에 따라 그 지방의 독특한 개성적인 토속미와 그 지방사람들의 기질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충청도의 계룡산 지역에서는 백자와 여러 종류의 분청사기를 빚어 왔습니다. 여기서 필자가 계룡산 도자기라 표현하는 것은 다른 데서는 빚지 않고, 계룡산 지역에서만 빚어졌던 개성 있는 도자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덤벙분청(백토를 물에 풀어 덤벙 담가냄)이라는 전라도 지역에서만 대부분 생산된 분청사기가 있습니다(필자는 덤벙분청사발을 전라도사발이라 부릅니다).

붓으로 백토를 칠한 후 철가루(철사)로 그림을 그린 것은 충청도의 계룡산 부근,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서만 생산되었습니다. 철가루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붓으로 백토를 바른 도자기는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었습니다.

붓으로 백토를 칠한 후, 그 위에 철가루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를 학문적으로는 분청철화문이라 부르나 일명 계룡산도자기라 부르기도 합니다.

▲ 귀얄기법(백토를 붓으로 칠함)
ⓒ 신한균
물레로 그릇형태를 빚고 나서 붓으로 하얀분을 칠하는 것을 도자기용어로 귀얄기법이라 부르며, 일본은 이 기법을 하게메(刷毛目)라 부릅니다. 계룡산 도자기의 이 철화기법은 회흑색, 흑갈색 태토 위에 반드시 백토를 붓으로 칠합니다. 밑부분은 그대로 남겨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라도 지방음식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다 있지만, 전라도 음식 중 홍어찜은 전라도의 특성이 아주 강합니다. 충청도에는 여러 도자기가 있습니다만, 계룡산도자기를 음식에 비유한다면 독특한 홍어찜에 해당됩니다.

필자는 계룡산 동학사 부근에서 계룡산도자기를 빚었던 옛 가마들을 계룡산요라 부릅니다. 이 계룡산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을 1927년 왜정시대 총독부 박물관에 근무하는 노모리켄(野中健)의 답사에 의해서입니다.

이 때 27기의 옛가마(요)를 발견, 그 중 7기를 같은 해 발굴했습니다. 발굴 결과, 여기서는 비틀어지거나 사소한 흠은 있지만, 온전한 분청사기가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반면, 대부분 옛 가마터는 깨어진 파편 즉 사금파리만 발견됩니다.

이때부터 계룡산도자기는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 도자기로서 세상에 알려지고, 일본의 다도세계는 계룡산요에 주목하게 되고 계룡산 도자기의 가격도 폭등합니다. 이때부터 일본인 골동품 상인들은 호리꾼을 총동원시켜 옛 계룡산요를 도굴하여 일본으로 많이 가지고 갑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일본에는 계룡산도자기가 많습니다.

계룡산요의 역사를 고찰해보면 계룡산요에 관해서는 일본의 아사카와 노리다까가 쓴 <동학사 사적기>에 "세조가 이 절을 지나다가 이례적으로 ‘주이십리(周二十里)’의 산림을 이 절에 하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양모의 한국의 도자기)

동학사 부근 주이십리 안에 계룡산의 옛가마터가 있습니다. 앞의 기록을 유추해보면, 계룡산요는 불교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 사료됩니다.

▲ 계룡산도자기의 대표작
ⓒ 일본 동양도자미술관
계룡산 도자기는 시대적으로 분청사기의 말기시대에 해당되며, 분청사기는 임진왜란 전에 이미 소멸되어 이 땅을 떠났고, 그 후로 우리 민족은 백자만을 사용하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면, 계룡산 도자기에 스며든 우리민족의 정신세계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계룡산 문양의 독특한 질감을 필자가 표현해 보면, 절에서 참선을 합니다. 참선을 하는 이유는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참선을 통해 도를 깨우친 스님은 마음에 무엇이 걸림이 없고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위자연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 무위자연을 도자기로 표현한다면 계룡산도자기가 대표적이라 생각합니다. 즉, 걸림이 없는 추상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필자는 옛 충청도 계룡산 지역의 사기장들은 자유혼을 가슴에 품고, 그 당시 서민들의 해학과 여유를 추상적으로 단순화 시켜 박진감 있게 표현한 것이 바로 계룡산도자기라 생각합니다.

▲ 계룡산도자기의 한부분. 태토(흙) 속에 모래와 작은 돌이 박혀있다
ⓒ 신한균
그런데 계룡산도자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태토(도자기흙) 속에 작은 돌들이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일부 미학자들이 계룡산도자기에 대한 깊은 고찰과 연구도 없이 만드는 공정을 무시하고, 다만 추측으로 지방 가마에서는 흙을 대강 수비하여 태토로 만들었으리라 여기고, 또한 도자기 만드는 과정도 대강 만든 것이라 말합니다.

이 대강 만든 그것이 소박하여 비천한 사기장의 가난한 심성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도자기에 내포되어 있고 이 아름다움을 ‘애상의 미’라 부릅니다.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도자기를 ‘애상의 미’라 격하시킨 일본의 식민사관에 입각한 미학 논리입니다. 옛 우리 사기장(일본: 도공)의 솜씨를 왜곡시키는 말입니다. 이유는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자라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필자는 한국사기장으로서, 아니 도자기 만드는 기술자로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한 예로, 학봉리 가마터에는 거칠지 않고 잡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사금파리가 많습니다. 이 것은 흙을 정제(수비)할 기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기장은 흙을 정제할 때 한꺼번에 합니다. 그리고 정제한 흙에다가 필요에 따라서 거친 모래나 작은 돌을 섞어줍니다. 거친 흙을 사용할 때는 그 나름대로 사용할 이유와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좌-부르튼 현상, 우-불심이 약해 무너진 접시
ⓒ 신한균
이유 중의 하나는 불심(화도)을 높이려고 일부러 거친 모래나 작은 돌을 넣기도 합니다. 바로 위의 사진처럼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거친 모래나 작은 돌이 섞인 흙은 물레로 도자기를 만들기는 힘드나, 완성되고 나서 도자기에서 나오는 따뜻하고 소박한 질감을 조선의 사기장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제된 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잡물이 섞여있는 흙으로 만드는 것보다 사기장에게는 훨씬 더 편하고 쉽습니다. 왜냐하면, 거친 흙은 사기장의 손에 많은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아주 낮습니다.

▲ 좌-물레성형(도자기 만드는 법), 우-타래성형(옹기 만드는 법)
ⓒ 신한균
물론 옹기, 토기는 완전히 수비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옹기나 토기의 깨어진 사금파리를 보면 흙 속에 모래나 작은 돌이 섞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옹기는 타래성형으로, 흙을 코일링으로 쌓은 뒤 방망이로 때려서 만듭니다. 그러므로 해서 손에 상처가 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계룡산 도자기는 조선 사기장들이 그저 우연히 소박하게 빚은 것이 아닙니다. 개성있는 자연미를 사랑하기에 흙 선정에서부터 치밀하게 계산하여 자연미를 살리고 우리 민족 정서에 맞게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대강해서는 도자기에서 진짜 자연미가 절로 녹아 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옆의 사발은 일본에서 미시마 다완이라 불리며, 이름은 二德三島 입니다. 이것은 철화 문양은 없으나 계룡산 사발입니다. (정양모 선생님)
ⓒ 일본 미쓰이그룹
그러면 이 계룡산 도자기는 어떤 배경에 의해 탄생되었을까요?

결국은 분청사기 자체를 백자로 가는 길목에서 존재한 도자기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계룡산도자기도 분청사기입니다. 이것은 당시 백자를 지양하는 조선사회에서 백자를 닮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보입니다.

그 당시 지방요에서는 엄선한 백토가 주성분인 백자태토를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회흑색, 흑갈색 점토(청자와 분청태토) 위에 붓으로 하얀 화장토를 칠해 하얗게 보이려고 노력하다가 탄생된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도자기와 계룡산도자기의 구별법을 소개하겠습니다.

▲ 본문참조
ⓒ 신한균
①계룡산도자기는 하얀 분(귀얄)을 붓으로 칠하되 밑부분 대부분을 남겨 놓았으나, 사발은 전체로 칠한 것도 있습니다.

②계룡산도자기는 하얀 분을 칠하고 그 위에 철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③대부분의 계룡산 도자기는 굽이 좁고 낮습니다.

④일반 도자기는 규석받침이 대부분입니다. 규석받침(부정)은 조선 초의 모든 지방가마에서 사용한 도자기기법입니다. 규석받침은 대부분 4~5개, 5개 정도입니다.(그림③참조)

유독 계룡산만이 왕모래받침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계룡산요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림③은 계룡산 도자기가 아닙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유는 왕모래 받침이 아니라 규석 받침이기 때문입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찻잔은 죽은 찻잔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찻사발에 차를 마시다 보면 찻물이 찻사발과 어울려져 그 차인의 심성이 찻사발 속에 배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차의 심성이 가장 잘 어울려지는 대표적 도자기가 계룡산 도자기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계룡산 도자기는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이 많습니다. 망자를 위해 무덤에 넣은 도자기입니다. 이 것을 다도구로 사용하고 싶다면 스님이나 신부, 목사님을 통해 그 도자기가 묻혀있던 무덤의 주인인 망자의 혼을 달래고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 진주멧사발, 일본大井戶茶碗, 銘:喜左衛門井戶
ⓒ 대덕사 고봉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의 국보사발인 진주멧사발(대이도자완)이 절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이 국보사발을 소유했거나, 이 국보사발로 차를 마신 사람은 말로가 비참했습니다. 역적으로 몰리거나, 피부병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발에는 인간이 가지면 재앙을 받는다는 소문이 나서 일본의 대덕사라는 절에 안치하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이유를 압니다.

이 사발은 조선시대 조상의 제를 위해 정성껏 빚은 제기였습니다. 망자를 위한 사발을 망자의 혼도 위로하지 않고 사용해 벌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차세계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일본의 다도세계에서는 망자의 무덤에서 출토된 찻사발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출토된 사발을 부득이 사용해야 된다면, 차를 잘 아는 스님에게 위탁하여 스님이 몇 년간 차를 마셔 액운을 땐 뒤 사용합니다.

사실 오늘날 일본 골동시장에서는 무덤에서 출토된 찻사발보다 출처가 확실한 현대 도예가의 작품인 찻사발이 훨씬 비쌉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유명한 조선 찻사발은 아주 비쌉니다만, 유명한 조선 찻사발에는 몇 백 년 전부터 누구에 의해 사용되었는지 어느 유명한 차인이 사용했는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기록이 있는 찻사발이 바로 유명한 찻사발이며, 아주 아주 고가입니다.

필자는 우리사발의 우리이름찾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 계룡산사발에 이름을 짓고 있는 범하스님. 위의 계룡산사발 이름은 해조음(海潮音)입니다.
ⓒ 신한균
여기서 계룡산 사발에 차를 마시다가, 그 그릇에 아름다움을 간파해 그릇에 이름을 붙인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분은, 한국을 대표하는 차인이자, 우리나라 문화재 전문위원이기도한 통도사 성보박물관 관장님이신 범하스님입니다. 이 분이 계룡산 사발에 이름을 지었습니다.

심미안을 가진 차인이 찻사발에 차를 마시고 나서, 그 찻사발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찻사발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우리나라 차문화를 더 한층 발전시키고, 나아가 우리나라 도자문화의 발전에도 기여하리라고 필자는 확신합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도자기에 묻어 있는 일본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옛그릇 이름 되찾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학자가 왜곡한 우리 도자사를 바로잡을 뿐 아니라 미학자들이 왜곡한 도자기의 본질을 사기장인 제가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며 책을 쓰고 있습니다.

2004-03-10 20:03 ⓒ 2007 OhmyNews

출처 : 내장산제다원
글쓴이 : 심산 박동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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